엄마의 건강 '따위', 비바람 몰아치는 날씨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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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건강 '따위', 비바람 몰아치는 날씨 '따위'
  • 문윤희 기자
  • 승인 2023.06.07 0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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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아. 엄마가 많이 아파. 밖에 비도 오는데 오늘은 집에서 클레이 놀이하고 놀까?"

"엄마. 비가와도 나갈 수 있어!. 000 알지? 거긴 비가와도 갈 수 있잖아. 엄마 몸이 많이 안좋아? 그럼 거기 가서 좀 쉬어."

그래. 그런 것이었다. 유진이의 세상 탐험은 엄마의 컨디션이나 날씨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엄마의 태도 탓이다.

육아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유아시절부터 유년시절까지 '환경(이것은 아이가 체험하는 모든 환경을 말한다)'이라는 것을 늘 철학으로 삼아왔다. 무슨 말인고 하면, 엄마가 자랐던 시절에는 비록 서울 도심이긴 했으나 주변에 나무가 많았고 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 들어가 살아있는 생물을 볼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의 밥 짓는 소리와 시끄럽게 짖어대던 동네 강아지 소리, 짹짹이는 참새소리가 아이를 맞이하는 그런 환경.

대문 밖을 나서면 동네 아이들과 놀이가 시작되고, 사방으로 시멘트와 벽돌 바닥이 깔려있지만 차가 언제 오는 지 걱정하며 뒤를 살필 필요가 없이 맘껏 골목골목을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환경. 엄마가 누렸던 그런 환경을 줄 수 없어 엄마는 늘 유진이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엄마는 주말이면 '사명'처럼 아이가 즐길 수 있는 곳에 모셔다 드리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더 정확히는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한 어른으로서 미안함을 '체험'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이런 태도와 환경제공은 '엄마가 쉬는 날=제대로 노는 날'이라는 공식을 심어주기 충분했고,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한번은 어린이집에 정말 가기 싫은 표정으로 엄마와 대치 중이던 유진이가 갑자기 가방을 메면서 이런 말을 던졌다.

"어린이집은 엄마랑 주말에 놀러가기 때문에 참을 수 있어."

주섬주섬 신발을 챙겨 신는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는 이런 이유로 엄마가 아프거나 비가 오는 날이어도 결단력 있게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를 더하자면, 아이는 무서운 기억력(이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유리한 것에서만 기특할 정도로 좋다)을 뽐내기도 한다. 자신과 연결된 주제로 엄마와 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기억해 가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아이 앞에서는 냉수도 못 마신다.", "아이 앞에서는 자나깨나 말조심"하라는 어른들의 경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진이는 걱정말고, 엄마는 앉아서 쉬고 있어." 컨디션 난조의 엄마를 생각해 체험학습에 즐겁게 임하는 딸내미.  
"유진이는 걱정말고, 엄마는 앉아서 쉬고 있어." 컨디션 난조의 엄마를 생각해 체험학습에 즐겁게 임하는 딸내미.  

지난해 안양에 이사를 오면서 비가 오면 갈 곳이 없다는 내 푸념에 남편은 집 인근 '아이와 갈 만한 곳'을 이리저리 찾아봤다. 다행히 차로 5분 거리에 '비상용'으로 갈 만한 실내놀이터와 전시관이 있다는 것을 남편이 내게 말해 주었다. 엄마의 안도에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이는 그 대화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지난해 가을. 엄마가 아빠에게 건넨 "이번에 000 가야겠어. 몸이 안 좋아서 체험학습 시키고 좀 앉아 있어야겠어"라는 말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운전할 기력도 없는 엄마가 택시를 타고 간 000에서 아이는 선생님이 지도하는 체험학습을 너무 즐거워했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 경험이 너무 좋았던 지 유진이는 "언제 다시 해볼까?"하며 재방문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그리고 5월 중순. 엄마는 한 달 내내 콧물을 찔찔 짜내던 유진이를 돌본 뒤 심한 후두염을 앓게 됐다. 감기 기운으로 시작된 몸살은 어느 순간 후두염으로 옮겨갔고, 이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의 몸은 이미 망신창이인데 비 오는 주말 아빠는 근무를 뺄 수 없어 온전히 유진이와 둘이 있게 되는 신세가 됐다. 

엄마의 컨디션을 살피던 유진이는 오전 시간을 제법 잘 노는 듯 했다. 하지만 금세 '혼자하는 놀이'가 재미 없어졌는지 창밖을 한번 보더니 "비가 안그칠 것 같지?"하고 넌지시 엄마에게 물었다. 

"응. 비가 계속 오겠네."

"그럼, TV를 좀 봐도 될까"

"그럴까?"

"그럼 000를 틀어줘."

한 시간 정도 엄마에게 몸 추스를 시간을 준 유진이는 TV를 꺼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집에는 못 있겠다는 표정으로 "엄마, 이제 좀 나가볼까?"라며 옷장으로 향했다.

앞서 언급한 대화 내용대로 아이는 결국 엄마를 일으켜 세워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었던 체험을 만끽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진이는 엄마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엄마. 정말 고마워요. 오늘 정말 행복했어요. "

그래, 엄마의 컨디션 따위, 이 놈의 비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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