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엄마, 두더지 아빠 그리고 꿀돼지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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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엄마, 두더지 아빠 그리고 꿀돼지 유진
  • 문윤희 기자
  • 승인 2023.03.09 0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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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이거 유통기한 다 됐잖아. 언제 먹을꺼야?"

남편은 오늘도 냉장고 어딘가에 쓸쓸하게 있었을 식재료 하나를 찾아내 저에게 핀잔을 줍니다. 일을 하는 아내라서 그리고 엄마라서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주말 밖에 없는데, 주말 역시 시간이 많지 않아 계획했던 반찬만들기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채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남은 식재료들은 잘 구획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데 야속하게도 (기적과 같이)생각이나서 반찬으로 만들려고 하면 이미 유효기간은 저 멀리 과거의 시점이 된 상태입니다.  

아내의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남편은 그냥 버려지는 식재료에 대한 아쉬움과 아내(요리를 하겠다는)의 욕심으로 인한 행태에 분노하며 주말이면 냉장고를 정리합니다. 이젠 거의 습관이 됐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몇차례 남편의 잔소리를 들으며 식재료를 정리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왠만큼 정리된 냉장고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다가올 평일 저녁 식사를 위해 저는 지지 않고 다시 장보기에 나섭니다. 

그런데 정말 마법같은 일은, 장을 볼때 일어납니다. 분명 집을 나서기 전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재료들을 정해서 나오는데 막상 장을 보면서는 꼭 하리라 마음 먹었던 요리 외에 '할 수 있겠다' 싶은 요리들이 머리 속을 채우게 됩니다. "그래, 이것도 해보자"라는 쓸데없는 호기는 어김없이 카트를 채우는데 기여합니다. 

채워지는 카트를 바라보며 남편은 "이건 뭐할려고 고른거야?"라며 확인작업을 합니다. 그럼 저는 아주 경쾌한 목소리로 "00를 할꺼야"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의욕적인 얼굴의 아내에게 심한 욕을 할 수 없는 남편은 어금니를 꽉무는 시늉을 하며 "자기야, 이거 언제할려고 하는건데"하며 다시 한번 시점을 확인합니다. 

이쯤되면 재료를 뺄지 고민해야 하는데 저는 더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수요일은 오후 일정이 빨리 끝나니까 조금 일찍 들어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라고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남편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음에도 "꼭 해야해. 자기가 한다고 했으니까"라며 반쯤은 포기한 채로 채워지는 카트를 허무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아, 그거 할려고 했는데 까먹었네." 

주말이 다가오면 저는 어김없이 위에 대사를 읊조립니다. 조금은 슬픈 심정으로요. 그래도 요리를 만드는 성공 확률을 굳이 따지자면 한 30%는 되것 같습니다만, 이게 굉장한 심적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늘 아이에게 저녁을 맛나게 차려주진 못해도 하나쯤 새로운 반찬을 직접해서 줬다는 만족감을 주기도 하고, 평소 풍성한 식사를 차려주지 못한 미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운 좋게 후다닥 만든 한 상 차림이 유진이의 입맛에 맞아 "엄마, 맛있어요"라는 말을 듣는 날에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기쁨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간혹 남편분도 "맛있게 됐네"라며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랩처럼 흘려주니 살짝 보람이 있달까요. 

이런 엄마의 기질을 유진이도 어느정도 간파했는지 한번은 다람쥐책을 읽다가 "엄마랑 똑같아"라고 합니다. "왜 다람쥐가 엄마랑 똑같다고 생각해?"라고 물으니 아이는 "음식을 차곡차곡 잘 모아두잖아"라며 해맑게 웃더군요. 살짝 기분은 안 좋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남편을 위한 일격을 위해 아이에게 순진한 티를 내며 질문을 던집니다.  

"아빠는? 아빠는 어떤 동물 같아?"라고 했더니 아이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아빠는 두더지! 아빠는 냉장고 깊은 곳을 잘 파"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의 순진하지만 정확한 진단에 엄마와 아빠는 파안대소 합니다. 아이도 덩달아 웃더니 곧 엄마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엄마, 나는 어떤 동물하고 비슷해?" 

그날따라 엄마가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어준 유진에게 이렇게 대답했죠. "유진이는 맛있게 밥을 잘 먹어서 돼지야. 꿀꿀꿀 귀여운 돼지." 아이는 자신을 돼지로 비유한 엄마의 말에 까르르 넘어갑니다. "맞아, 유진이는 돼지야. 꿀꿀돼지. 밥을 잘 먹으니까." 한 껏 기분이 좋아진 유진이는 엉덩이까지 이리저리 흔들며 꿀꿀이 춤을 추네요. 이렇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유진이의 5살의 3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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