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못난이랑 작은 못난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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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못난이랑 작은 못난이랑 
  • 문윤희 기자
  • 승인 2023.02.17 0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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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딸기킬러'로 불리는 유진이는 요즘 아침부터 '딸기'를 찾습니다. 덕분에 땅콩버터 전쟁은 몇일 휴전 중입니다. 
일명 '딸기킬러'로 불리는 유진이는 요즘 아침부터 '딸기'를 찾습니다. 덕분에 땅콩버터 전쟁은 몇일 휴전 중입니다. 

요즘 남편과 저는 딸아이의 닮은 점을 두고 서로 경쟁하듯 핀잔을 주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결혼 10년차가 다가오니 좋은 점 보다 미운 점이 더 많이 보여서일까요? 상대에 대한 불만과 미움이 아이의 닮은 모습과 겹쳐져 올 때마다 말로하기 거북스러운 감정들이 스물스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옵니다. 

유전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유진이는 아빠의 싫은 점과 엄마의 싫은 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아이에게 무언가 잘 못됐다고 꾸중을 할 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편은 저에게 항상 “제 멋대로”라며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을 진심을 담아하는데 유진이 역시 엄마의 성향을 닮아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놀이를 진행할 때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마다 남편은 “엄마를 닮았네”라며 끌끌 혀를 찹니다. 얇아진 실눈을 치켜뜨며 뚫어질 듯 째려보면 그제서야 “유진아, 뭐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해볼까”라며 방금 내뱉었던 말을 정정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남편의 욱하는 성미가 맘에 들지 않는데 유진이가 이걸 고스란히 물려받아 아이에게 자주 말실수를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유진이는 아침에 엄마가 구운 빵이나 쿠기에 주스나 우유, 과일을 곁들인 간편한 식사를 합니다. 요즘엔 땅콩버터를 빵에 발라 먹는 재미에 빠져 나이프로 직접 바르곤 하는데 이게 자기 마음대로 잘 되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애석하게도 미적 감각에 하필이면 눈을 떠서, 아침마다 가지런히 발라지지 않는 땅콩버터에 자주 분노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

엄마와 아빠가 바른 땅콩버터가 너무 가지런해서 화가 나는 유진이는 몇 번이고  땅콩버터를 고쳐 바르곤 하는데 이게 하면 할수록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 속이 타기만 합니다. 결국 몇 번 시도 끝에 지친 유진이는 “내 빵이 안 이뻐”라며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리다 뭔가 분하다 생각이 드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떠는 모양으로 “아우, 씨씨”하며 감정을 분출합니다.  

엄마의 손을 빌려 함께 땅콩버터를 가지런히 발라도 유진이는 ‘혼자서 완성’하고 싶은 결과를 얻지 못해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맙니다. 어르고 달래던 엄마도 이 단계에 들어서면 고운 목소리가 나가지 않습니다. “유진아, 맛있으라고 바르는 거잖아. 잘 발라졌으니까 이제 맛있게 먹어보자”라고 다그치다 결국엔 “안먹으면 치울꺼야”라는 경고를 날립니다.

아이는 곧 치워질 접시로 온 신경이 집중됩니다. “안돼. 안돼. 내가 먹을 거야. 치우지마”라고 사정을 하면서도 입에 빵을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엄마도 인내의 한계가 와서 접시를 치우면, 아이는 다시 분을 이기지 못해 방방 뛰며 “유진이꺼야. 돌려줘. 돌려줘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와 남편이 오버랩되면 저는 한숨을 내쉬며 "어쩌냐, 내가 선택한 것인데 무를수도 없고"라며 본인을 탓합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언니와 오빠, 제가 말썽을 부리면 자주 하던 말 버릇이 "문가라면 이가 갈린다"고 했는데 그런 표현의 현재 버전을 제가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번은 이런 자책 섞인 하소연을 혼잣말로 하는 저를 보고는 남편이 "큰 못난이, 작은 못난이가 똑같네"라고 핀잔을 주기에 "왜 나는 (유진이가)자기 닮아서 속이 상한 건데"라고 응수하자 "저봐, 갈피 못잡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엄마랑 똑같잖아"라며 정곡을 찌릅니다. 

아차차. 그러게요. 저도 제가 그런 성향이 강한 지 몰랐는데, 왔다리 갔다리 생각이 자주 바뀌고 결정을 잘 못하는 부분을 유진이가 고스란히 물려 받았네요. 가까이 보니 몰랐던 유진이의 모습을 남편이 상기시켜 알게 됐습니다.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맘에 들때까지 뭔가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는 특성이 고스란히 유전된 것입니다. 그런 유진이를 보며 화가 나는 것은 아마도 제가 그런 과정을 자주 거치며 단계를 많이 압축시킨 경지에 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화를 누르며 "유진아.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엄마랑 저녁에 다시 빵 바르는 거 해보자. 이제 늦었으니까 옷 입고 어린이집 가자"라며 아이를 꼬옥 안아줍니다. 

조금 진정된 유진이는 장난기가 올라 옷을 입히려는 엄마 주변을 뱅뱅 돕니다. 등원 거부의 새로운 표현인데, 저 역시 어린 시절 학교에 가기 싫어 가방이나 내복을 엄마 몰래 숨겨두었던 추억을 유진이가 소환합니다.  

유진이는 자신만의 버전인 '나 잡아봐라'를 시전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평소에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시간이 정해진 간담회나 미팅을 가야 하는 때는 입장이 달라집니다. 그럴 때 마다 "엄마도 일하러 가야해. 이미 늦었어"라는 말을 우선 던집니다.  굴하지 않으면 "엄마 먼저 갈께. 유진이 아빠랑 가"라고 톤을 바꿔 대응합니다. 곧 저기서 꾸물거리며 엄마에게 다가오는 유진이가 보입니다. 

바쁜 손으로 옷을 갈아입히는 엄마에게 유진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는 말로 무장해제를 시킵니다. 짜증이 오르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립니다. 
"엄마도 유진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한바탕 소란이 지난 뒤 현관문을 나서는 둘의 뒤통수에 남편은 한마디를 던집니다. "큰 못난이랑 작은 못난이. 잘 다녀와" 
매일 반복되는 저희 집의 출근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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