⓵'일과 가정'의 양립 속에서 타협점 찾기
국내에서 영업 활동을 하는 다국적제약사는 한국글로벌의약품산업협회 소속 회원사를 기준으로 48개에 달한다. 이 중 여성이 리더를 맡은 회사는 15개사로 다국적제약 산업 내에서 31%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어떤 산업에서도 보기 드문 여성 리더들의 활약은 그 만큼 이 영역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적임을 보여준다.
뉴스더보이스는 최근 비중이 늘고 있는 다국적제약사 여성 리더들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사회인이자 리더로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여성으로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 보기 위해 GM(General manager, 한국 지사 대표) 9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기획기사를 위해 진행된 서면 인터뷰에 직접 응답한 6명은 강소영 애브비 대표, 김소은 오가논 대표, 손지영 모더나 대표, 양지혜 베이진 대표, 이연재 레코르다티 대표, 황세은 바이오젠코리아 대표 등이며 배경은 사노피 대표, 이혜영 한국BMS 대표, 김민영 안텐진 대표 등은 기존에 기자와 진행했던 인터뷰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인터뷰 대상이 된 GM들은 대외협력부서가 있거나 PR에이전시를 통해 인터뷰가 가능했던 회사를 대상으로 했으며, 가급적 전통 제약기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회사를 선정해 진행했다.
인터뷰의 주요 질문은 다국적제약기업에서 여성으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 과정에서의 어려움, 일과 가정의 양립, 다양성 존중을 위한 노력과 후배들에 대한 조언, 향후 과제 등으로 구성했다.
첫 기사는 이들이 여성이자 직업인, 회사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와 이를 해결하는 과정,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풀어냈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여성 GM들은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꼽은 가장 큰 난관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와 일과 가정의 양립을 꼽았다. 이번 인터뷰에 응한 9명 모두 여성이자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과 가정' 또는 '일과 양육'의 양립이 얼마나 힘든 과제이며, 이를 수행해 나가는 사이에서 일을 포기하게끔 하는 수 많은 고비가 있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성'으로 조명되기 보다는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한 '개인'으로 다뤄지기를 희망했다.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 현재를 만들어 내는 험난한 과정을 본인 세대에서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열망을 보이기도 했다.
'일과 가정' 양립이라는 딜레마를 풀어가는 중
그러나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숙제는 아직까지 이들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다만 업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난의 과정을 공유하고 위로하며 회사가 어떻게 여성을 지지하고 사회적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환경과 인식을 변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다국적제약업계의 최연소 여성 GM으로 주목을 받았던 양지혜 대표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이제 막 한국 시장에 둥지를 틀고 있는 베이진코리아의 리더로 일하는 여성의 고충을 묻는 질문에 '일과 삶의 균형'을 꼽았다.
"회사에서 역할과 아직 어린 두 자녀의 엄마로서의 역할에 모두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종종 생기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도 스트레스가 생기곤 한다. 어느 정도 제 자신과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배 리더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황세은 바이오젠코리아 대표는 "아이가 어릴 때는 일과 가정일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특히 아이가 아플 때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면서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엄마가 하는 일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어느 순간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게 되는 날이 왔을 때 과거의 어려움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본사와 밤 늦게 회의를 진행할 때 어린 자녀를 품에 앉고 있는 경우도 가끔 보게 된다"면서 "이러한 어려움은 사회생활을 하는 엄마들의 공통된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이연재 레코르다티코리아 대표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결혼 후에도 가정생활에서 여성이 해야 할 역할이 남아 있고, 이 부분은 남편과 동반자로서 함께 영위하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많은 부담이 지워진다"면서 "출산율 등과도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에서도 고민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을 전했다.
배경은 사노피 대표 역시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을 지속할 지 여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교육, 교우 관계 등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엄마로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다만 그는 "아이들이 자라고 이제 성인이 되면서 지금의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여전히 많은 여성 후배들이 어린 자녀의 양육과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민영 안텐진 대표는 "나 역시 아이 둘을 키우며 일을 계속해야 할지 아이들을 키워야 할 지 고민 하던 때가 있었다"면서 "그 과정이 힘들었지만 엄마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일을 지속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아이들이 엄마가 자신의 진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알아서 과를 선택하고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었다"면서 "엄마의 인생에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이들도 커가면서 알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인터뷰 대상 중 맡 언니 격인 손지영 모더나 대표는 "회사를 창립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로 인해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 가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가정이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
강소영 애브비 대표는 회사가 여성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최대 지원자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강 대표는 "회사 내에서라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포용적인 문화와 여성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조직 내에서 여성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런 난관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애브비는 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WLA(Woman Leaders in Action)를 구성했고 내가 아시아 지역 리더를 맡게 됐다"고 소개했다.
WLA의 아시아 지부는 LUNA-WLA팀으로 불린다. 강 대표는 "아시아 여성 리더들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 여성직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조직 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양성과 평등성에 더해진 공정한 평가가 나를 세우다
한국 법인 대표의 자리에 오른 여성 GM들이 입을 모아 말한 공통의 성공 요인은 꾸준한 노력, 이를 바탕으로 한 공정한 평가,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인식 개선이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조언 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황세은 바이오젠코리아 대표는 "제가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사회, 가정 그리고 직장 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많이 개선됐다. 본사와 리전에서도 많은 여성 리더들이 활약하고 있고, 바이오젠코리아 내에서도 여성이 더 많은 상황이다. 남녀라는 성별에 자신의 정체성을 국한하기 보다는 본인의 경쟁력과 능력을 믿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본인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소영 애브비 대표는 '선택과 집중, 몰입'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나의 경우 그때 그때 주어진 일과 역할에 집중하려고 했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즐기면서 일하고자 했다. 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하기 보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집중했다. 나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상사나 부하직원과 대화를 했다. 이것이 일과 생활을 균형있게 유지한 비력이다. 미래와 결과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거나 포기하기 보다는 현재의 일을 즐거워 몰입하다 보면 좋은 결과는 자연스레 따로온다고 믿는다."
이연재 레코르다티 코리아 대표는 일관성과 열정을 핵심 키워드로 꼽았다.
"많은 인내와 희생, 그리고 변치않는 열정과 일관성이라는 부분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특히 한국이 여러 면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경쟁력이 높아지는 부분에서는 개인의 경쟁력도 중요하기에 사용하는 말투, 매너, 여러기지 기술 등 갖춰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김소은 오가논 대표 역시 목표와 열정을 강조했다.
"성장의 곡선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배울점, 재미 등을 찾아 열정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때로 힘겨웠던 시간들이 귀한 경험이 되어 인생에 크게 영향을 주는 밑거름이 되는 것을 나는 여러번 경험한 바 있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경험에 투자하고,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살리다 보면 또 다른 문은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이다."
양지혜 대표는 현실 조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저의 경우, 커리어를 쌓아 갈수록 제 삶에서의 우선 순위와 일에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미래에 CEO가 될 계획이 있는 후배라면 어떤 결정이든 자신이 더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장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지금의 나를 세운 원천은? 가족과 열정
적게는 15년에서 많게는 30년 가까이 제약산업에 종사하며 현재 자리에 오른 여성 GM들은 일을 하는 원천으로 '가족', '열정', '선택'이라는 키워드를 꼽았다. 이 중에서 가족은, 더 세부적으로 육아는 여성의 사회적 성장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원동력이 되는 중요한 가치임을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번 부각되기도 했다.
이연재 레코르다티 코리아 대표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동력에 가족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업계 선배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은 한 여성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른 한 여성의 희생이 반드시 뒤따른다."
이연재 대표는 오늘 날의 자신을 만든 결과는 육아를 함께 한 부모세대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여성이자 리더로 성장하는데 가족의 기여가 컸음을 강조했다.
황세은 바이오젠코리아 대표는 가족이 주는 의미를 해학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바이오젠코리아 창립 시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구축해야 했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면서 "당시 아이들도 수험생활을 했던 때라 업무 외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지만, 아이들과 남편은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오랜 경험으로 기대치가 매우 낮았던 터라 본인들이 알아서 할일을 해준 덕분에 무사히 그 시기를 잘 넘겼다"고 회고했다.
강소영 애브비 대표는 "자녀의 나이나 시기 등 가족이 놓인 상황에 따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때와 가족에 더 집중할 때를 판단해 그에 맞도록 조율했다"면서 "회사의 탄력 근무제나 재택근무 등을 활용해 나 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각자의 상황에 맞도록 지혜로운 방법을 함께 찾아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