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 분쇄 따른 용량 오차·약사 분진 노출 우려…환자안전 문제 지적
식약처에 제도 개선 건의…제형 개발 인센티브·허가사항 개선 요구
미숙아와 영유아, 노인, 삼킴 곤란 환자 등 알약을 삼키기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가루약(산제)과 시럽제 생산을 확대해야 한다는 병원약사들의 요구가 나왔다.
의료현장에서 한 달에 26만건이 넘는 산제 처방이 이뤄지고 있지만, 완제품 공급이 부족해 약사들이 정제를 직접 분쇄해 조제하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확한 용량 투여가 어려워지거나 조제자가 약물 분진에 노출되는 등 환자와 약사 모두의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병원약사회(회장 정경주)는 최근 의료기관의 산제 수요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산제·시럽제 생산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의견서에는 산제·시럽제 생산 지원을 비롯해 물에 용해 가능한 정제 개발 활성화, 의약품 허가사항에 분쇄·용해·경관투여 가능 여부 명시, 환자 맞춤형 제형 개발에 대한 제도적 인센티브 마련 등이 담겼다.
40개 병원서 월 26만5000건 처방…상급종합병원 수요 더 높아
병원약사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의료기관 40곳의 산제 처방은 월 약 26만5000건에 달했다.
전체 처방에서 산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처방 매수 기준 6.5%, 품목 수 기준 7.0%로 집계됐다. 특히 상급종합병원 24곳에서는 각각 7.3%, 8.0%로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이번 조사는 응답 의료기관의 원내 예상 사용량만 반영한 것으로, 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의료기관과 원외 처방까지 포함하면 실제 산제 수요는 더욱 클 것으로 병원약사회는 내다봤다.
문제는 이 같은 수요에도 불구하고 제약사가 생산하는 산제와 시럽제 완제품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의료기관에서는 적절한 제형이 공급되지 않아 정제를 분쇄한 뒤 환자별 용량에 맞춰 나누어 조제하는 작업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정제를 분쇄하는 과정에서 약물 손실이 발생하거나 성분이 균일하게 분포하지 않을 경우 정확한 용량을 투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치료 효과 저하나 이상반응 발생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환자 특성에 따라 필요한 제형도 다르다.
영유아에게는 산제와 시럽제, 현탁용 제제 등이 필요하며, 노인과 삼킴 곤란 환자에게는 가루약이나 구강붕해정처럼 복용이 쉬운 제형이 요구된다.
특히 경관급식 환자는 캡슐 내부의 과립이나 장용정 등을 투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어 물에 용해할 수 있는 제형의 필요성이 더욱 크다.
정제 분쇄에 약사 업무 부담 가중…자동화 장비 활용에도 걸림돌
산제 완제품 부족은 의료기관의 조제 업무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정제를 일일이 분쇄하고 환자별로 나누어 포장해야 하는 데다, 조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에 약사가 노출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양병원은 상대적으로 적은 약사 인력으로 많은 산제 조제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 부담이 더욱 큰 상황이다.
최근 일부 의료기관에서 산제조제자동화 장비를 도입하고 있지만, 시판되는 산제 제형 자체가 부족해 장비 운영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병원약사회의 설명이다.
의료기관들은 산제 제형 개발 시 고려해야 할 요소로 1회분 포장 등 조제 편의성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안정성, 환자 복용 편의성, 용해도와 흡수율, 가격 경쟁력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국내 생산 요청 19개 중 14개 해외서 이미 공급
해외에서는 다양한 제형과 용량의 의약품이 완제품으로 생산되고 있어 정제를 직접 분쇄하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조사됐다.
병원약사회가 이번 수요조사를 통해 의료기관으로부터 생산 요청을 받은 산제·시럽제·구강붕해정 등 19개 성분·품목 가운데 14개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이미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메트포르민과 바클로펜, 유럽에서는 우르소데옥시콜산, 일본에서는 산화마그네슘 등이 관련 제형으로 공급되고 있다. 라모트리진은 미국과 유럽에서 생산되는 사례로 제시됐다.
병원약사회는 국내 제약사들이 산제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배경으로 허가·신고 및 심사자료 준비 부담, 산제 충전·포장과 시럽 제조를 위한 신규 설비 투자, 소량·다품목 생산에 따른 낮은 경제성 등을 꼽았다.
이에 따라 의료현장에서 수요가 확인된 품목을 중심으로 생산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모든 경구약 허가사항에 분쇄·경관투여 가능 여부 담아야"
병원약사회는 식약처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산제·시럽제 생산 확대와 함께 의약품 허가정보 개선도 요청했다.
우선 물에 잘 녹는 정제의 개발과 생산을 활성화하고, 의약품의 물에 대한 용해 가능 정보를 허가사항에 반영할 수 있도록 관련 기준을 검토해 달라고 건의했다.
또한 모든 경구용 의약품의 허가사항에 분할·분쇄 가능 여부와 산제 조제 및 경관투여 가능 여부 등 환자 특성에 따른 투여정보를 명시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삼킴 곤란이나 경관급식 환자에게 의약품을 투여할 때 의료진이 허가정보를 바탕으로 적절한 투여 방법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아울러 제약사가 환자 맞춤형 제형 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적 인센티브를 마련하고, 실제 의료현장의 수요가 확인된 산제와 시럽제의 생산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정경주 병원약사회장은 "영·유아, 노인, 삼킴 곤란 환자에게 적절한 제형을 제공하는 것은 환자안전의 기본조건"이라며 "산제·시럽제 공급 확대를 위해 제약업계의 노력과 함께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