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살예방의 날 맞아 전문가들 한목소리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할 ‘공중보건 위기’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우울증 조기 발견과 치료, 정부 정책 강화,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9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한국얀센이 개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전문가들은 자살 예방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우울증 관리와 조기 개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나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라 정신건강 문제와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는 점이 강조됐다.
유혜림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유해정보대응팀 팀장은 ‘자살예방정책의 현재와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자살은 단순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응해야 하는 재난 수준의 문제”라며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관심, 언론의 책임 있는 보도가 함께 작동해야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유 팀장은 특히 한국의 자살 문제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이 직접 자살을 ‘사회적 재앙’으로 규정했지만 지금도 하루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유 팀장이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자살의 주요 원인은 정신건강 문제였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가장 큰 원인으로 나타났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신체 질환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청년층 자살 문제가 빠르게 악화되는 추세다. 10~30대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사망 전 약 90%가 정신질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신건강 관리와 조기 치료가 자살 예방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유 팀장은 정부가 최근 자살 예방을 위한 현장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처음으로 자살 예방 예산이 추가경정예산에 반영되면서 관련 사업이 확대됐다”며 “응급실에 내원한 자살 시도자에게 최대 100만 원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사후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사업을 통해 연간 약 1400명의 자살 시도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자살 유족 지원 정책도 확대되고 있다. 유 팀장은 “자살 유족은 일반인보다 자살 위험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유족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주거 지원, 심리 상담, 학자금 지원, 정신과 치료 등을 연계하는 원스톱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업은 현재 11개 시도에서 시행 중이며 내년에는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유 팀장은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정부 정책과 예산 지원, 지역사회 안전망, 언론의 책임 있는 보도가 함께 작동해야 실질적인 자살 예방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우울증 치료 환경의 변화와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위험성도 함께 논의됐다.
조성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심각성과 새로운 치료 접근법’을 주제로 발표하며 우울증 치료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과거에는 한 가지 항우울제를 충분한 용량과 기간 동안 사용한 뒤 효과가 없으면 다른 약제로 교체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모두 치료 반응을 오래 기다리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기 발견과 신속한 약물 조정, 필요할 경우 약물 병용 치료가 현재 우울증 치료에서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도 언급했다. 그는 “과거에는 공황장애를 질병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질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우울증 진단 기준 역시 시대적 요인과 치료 환경 변화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살 위험이 높은 치료저항성 우울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치료저항성 우울증은 항우울제를 충분한 기간 사용했음에도 효과가 없고 다른 약물로도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며 “이 환자군은 일반 우울증 환자보다 자살 위험이 7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또 치료저항성 우울증 치료에는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환자들이 약물 시작 후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최소 2~3개월 이상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다”며 “증상이 호전된 이후에도 재발 방지를 위해 최소 1년 이상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치료저항성 우울증 치료제인 스프라바토(성분 에스케타민)의 치료 접근성 문제도 언급됐다.
조 교수는 “기존 항우울제가 세로토닌이나 노르에피네프린 등 특정 신경전달물질에 작용하는 것과 달리 스프라바토는 글루타메이트 시스템을 활성화해 뇌 시냅스 변화를 유도하는 새로운 작용 기전을 갖고 있다”며 “기존 치료에 실패한 환자들에게 빠른 반응을 보이는 거의 유일한 약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약은 프랑스와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 이미 급여화돼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 일부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긴급 상황에서 사용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치료저항성 우울증 환자 가운데 상당수는 조기 개입과 적절한 약물 선택만으로도 의미 있는 치료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며 “하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신약 치료제의 급여화를 통해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적절한 치료 환경이 마련돼야 자살 예방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