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두 돌, 그리고 세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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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두 돌, 그리고 세 돌
  • 문윤희 기자
  • 승인 2022.03.02 0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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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는 2월 중순을 기점으로 꽉 찬 36개월이 되었습니다. 한국 나이로 4살이 된 것이지요. 이쯤 되면 유아의 버전에서 벗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많은 면에서 아직 유아의 티를 벗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만 5세가 되면 본인이 할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는데, 아직 그 시기를 맞으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늙어가는 엄마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유진이와 보낸 각각의 12개월에 대한 소회를 풀어보려 합니다.

걸음이 느렸던 아이

유진이는 엄마의 눈에 '육체적 발달'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더딘 편이었습니다. 물론 의사선생님은 정상발달 단계라고 표현하지만, 뭐 어쨌건 이건 엄마의 시각이니까요.

유진이의 신체적 '느림'은 걷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온전히 걷기 시작한 것은 13개월 중반이 지나서였는데 이미 주변 아이들은 돌을 즈음해 혼자 걷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었지요.

엄마의 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뭐랄까요, 내가 아이에게 잘 못해주는 것은 없지만, 뭔가 부족할 수는 있고, 혹여라도 (대게는 없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샘솟게 합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유진이는 그냥 엄마를 닮아 '몸치'(몸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 못하는(?))였을 뿐인데 제가 지래 짐작으로 조바심을 냈었던 것이죠.

그래서 유진이는 돌이 지나도 '못 걷는' 아이로 엄마의 마음에 돌을 얹었고, 13개월 중순 이후 걷기 시작하면서 엄마의 부채의식은 다소 해소 됐으나 여전히 아이의 신체적 발달 사항은 엄마의 근심거리로 남아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신체적 발달이 다소 늦거나 뒤쳐지는 것은 온전히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기 까지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이건 순전히 엄마의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뒤뚱거리며 한발로 서는 걸 어려워하는 유진이를 보면서, 두발로 뛰는 것을 공포의 순간으로 인식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가진 특성을 무시한 채 왜 우리 아이는 신체적으로 이렇게 발달이 느린 것인가만 바라보던 저의 문제였던 거죠.

게다가 의학전문가가 "표준이다"라고 명확하게 내려준 진단을 무시하고 "다른 아이보다 왜 늦은 걸까"에 함몰돼 있었던 까닭에 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도대체 문제가 뭘까"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었죠.

두 돌, 말이 빠른 아이

아이가 무언가 조금 특출한 점이 있으면 엄마도 덩달아 우쭐하게 되는데 저의 경우는 유진이의 '말'에서 그런 점을 찾게 됐죠.

뒤뚱거리며 부자연스럽게 걷던 유진이는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돌 전후로 하기 시작하더니 "싫어" 하지마" 안돼"라는 부정어를 15개월 즈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죠. 18개월이 되던 때부터는 두 단어를 붙여 "엄마, 하지마"라던가, "맘마 좋아. 주세요"라는 말을 부정확하지만, 강한 의지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들려 준 "아이가 말이 빨라요 어머니"라는 칭찬은 유진이의 신체적 부진을 씻어주는 고마운 위로로 들렸습니다. 겸연쩍게 들었던 칭찬이 주변에서도 지속되자 저는 우쭐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아이가 말이 좀 빨라서요. 호호호" 드라마에 나오는 자식자랑을 하는 철부지 엄마의 현실판이 딱 제 모습이었달까요. 그렇게 유진이는 엄마의 마음 속 응어리진 부채를 '말'로 풀어 주었습니다.

유진이의 언어 능력은 두 돌을 기점으로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문장으로 엄마에게 전달하는데 능숙해졌고, 어른들에게 받는 칭찬이 나름 좋았던지 지나가는 어른만 보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아이가 됐습니다.

주말마다 들리는 마트 식품 코너의 한 할머니는 유진이를 보면 "말 잘하는 꼬맹이!!"라며 아는 척을 하셨는데 유진이는 할머니의 인사가 좋았던지 "할머니, 나 왔어요"라며 능숙하게 받아치는 경지에 이르게 됐죠.

그러나 너무 이르고, 잘하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유진이는 18개월부터 현재까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퇴근 후 저녁을 차리는 엄마의 뒤통수를 향해 단편 소설 분량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두 돌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이요.

"내가 할꺼야" 주체의식의 성장, 세 돌

세 돌을 맞은 유진이는 세수도, 이 닦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신을 신는 것도 모두 자기가 하려고 합니다.

장하고 보람스러운 일인 것 같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아침 출근시간은 절대로 그렇지 못합니다.

아침이면 식사부터 챙기고 등원을 위해 이것저것 짐을 싸고 옷을 챙겨 입히고 바로 나가야 일하는 시간을 빠뜻하게 맞출 수 있는데 33개월을 전후로 무엇이든 자기가 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 탓에 아침은 온전히 엄마의 인격 수양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기상해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옷을 입고 잠시 놀다 등원하는 이 몇 단계 안되는 과정이 정말 엿가락 늘이듯 늘여져 9시를 간당간당하게 맞추고 있습니다.

분명 아이 등원 준비는 8시에 다 했는데 옷을 갈아입기부터 현관문을 나서기 까지 대략 1시간이 소요됩니다.

양말을 신는 것과 신발을 신는 것, 코트를 입는 것은 정말 몇 분이 걸리지 않지만 이 사이 유진이는 장난감도 가지고 놀아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며, 목이 말라 물을 마셔야 하는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거죠.

처음에는 짜증을 내는 아이를 무시하며 옷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신을 신겼는데 이제는 엄마의 의지를 아이의 의지가 꺾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말신기도 신발신기도 양보할 수 없는 유진이는 엄마의 손이 가까이라도 올라치면 온 힘을 다해 도리질을 치거나 신겨진 양말과 신을 다시 벗기 일쑤 입니다. 이 역시 분이 안 풀리면 뒤로 홀라당 누워버리거나 온 힘을 다해 우는 일이 아침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쉬운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아침마다 돌아가신 엄마에게 사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 고생하셨었네"하고 말이죠.

그렇게 유진이는 모든 지 자기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미운 4살 시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머리는 염색을 그만해도 좋을 만큼 흰머리가 성성해지다 못해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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