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풍경> 시인과 촌장(1986)
지난해 12월 '불법계엄'이 지나간 이후 무려 40년 전 발표된 노래 한 곡이 다시금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개월 전 의료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의료대란이 일어난 지 1년 반이 지난 오늘, 세상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려 애쓰고 있고 의료현장을 떠났던 이들도 조금씩 돌아오는 모양새다.
나는 23년째 ‘선천성 수포성 표피박리증’이라는 희귀질환자의 보호자로 살고 있다. 이 질환의 합병증으로 피부의 구축과 합지가 심해져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날은 24년 2월 26일. 의대정원 2천명 증원 발표가 있던 날로부터 20일 후였다.
해당 수술은 피부 이식을 포함한 미세접합수술로 다수의 스태프를 필요로 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수술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병원의 수련의들은 모두 병원을 이탈한 이후였기에 당장의 수술은 불가했다. 지난 23년 동안 치료제가 없는 질환의 악화를 지연시키고 현상을 유지하고자 드레싱을 하며 상처를 케어하고 약을 먹이고 주사를 맞히고 다양한 합병증에 대응하며 검사와 수술을 반복하는 날들을 아이와 함께 견뎌냈지만 병원에 수술인력이 없어 수술을 못하는 현실은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처음엔 해당 교수님도 4월 10일(22대 국회의원 선거일) 이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돌이켜 보면 확신에 찬) 기대를 전하며 수술 예정일을 잡았으나 수차례 연기를 거듭하였고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이 100일 넘게 지속되자 ‘뉴스에서 전공의가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때 다시 내원하라’는 소식을 간호사를 통해 전달하였다. 그렇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희귀질환 판정을 받은 날로부터 끝날 것 같지 않은 오늘을 반복하며 오지 않을 것 같은 내일에 덧없는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는 모든 희귀질환자와 가족에게 이제 남은 희망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그저 24년 2월 6일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올해 6월, 병원은 이제 수술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지금은 수술에 앞서 검사를 진행하며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다. 수술은 예정대로 잘 진행이 될 것이고 재활도 빠르게 진행되어 곧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희망회로가 돌아가는 와중에 난데없이 불안하다. 오늘이 24년 2월 5일이면 어떡하지? 전에 없이 냉철하다. 희귀질환자의 제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대한민국에 희귀질환자의 자리가 있기는 한가?
“지옥이란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만수르 알할라즈(중세 이슬람 사상가)
2025년 현재, 세계적으로 8,000여개의 희귀질환이 발표되었고, 대한민국에서 관리하는 희귀질환은 1,314개 질환이며, 이는 모두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의료기술의 발전은 치료법 개발로 사라지는 질환과 함께 새로 발견되는 질환 또한 늘어나기에 인구 대비 희귀질환자의 숫자는 쉽사리 줄어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며, 타 질환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발생할지 알 수 없기에 국민건강 차원에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이에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정부의 환자에 대한 직접지원 또는 민간단체를 통한 간접지원 등의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희귀질환자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지원정책을 펼치며 치료제 개발과 삶의 질 개선이라는 두개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희귀질환자의 정확한 유병인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관용적으로 쓰이는 ‘80만 희귀질환자’라는 표현은 해외의 통계를 인구 대비 어림잡아 만들어낸 20년 전의 숫자일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통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는 대한민국에서 투명인간처럼 지워진 희귀질환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대한민국의 희귀질환자 지원정책은 2009년 7월 건강보험 산정특례제도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산정특례제도에 포함된 타 질환 대비 높은 치료비와 끝없는 치료기간에 걸맞지 않은 지원으로 희귀질환자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러한 희귀질환자의 삶을 뒷받침할 관련법은 2016년 12월 시행된 “희귀질환관리법”이 있으나 법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염병 관리와 같은 질환 관리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해당 법률은 희귀질환자의 삶의 질을 전혀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3주 전 자신의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를 보며 “힘없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사회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했다. 이를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국가의 태도와 별개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실용’을 중시하는 분이 ‘품격’을 말하는 이유가 단순히 ‘폼나니까’는 아닐 것이다. ‘품격’이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고 국가가 번영하는데 필요조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시기에 하신 말씀인 것 같아 하나의 제언을 드린다.
복지부 내에 희귀질환을 전담하는 부서의 신설이 매우 시급하다. 현재 희귀질환을 담당하는 부서는 질병관리청의 희귀질환관리과가 유일하며, 복지부 내에는 사무관 1인이 존재할 뿐이다. 희귀질환자의 목소리는 복지부와 질병청, 건보공단과 식약처 등을 떠돌다 허공으로 유야무야 사라진다. 질환을 관리하는 부서가 아닌 환자와 소통하고 환자의 삶을 케어하는 부서의 존재가 복지부 내에 반드시 필요하다.
신설된 희귀질환 전담 부서는 희귀질환자 전수 조사를 실시하여 사회적 존재로서 유의미한 통계를 확보해야 하며, 이를 국가 차원의 환자 레지스트리로 구축하고 총괄 관리하는 컨트롤타워로서 “국립희귀질환센터” 설립이 요구된다. 이로써 향후 일관되고 지속적인 희귀질환자 정책의 개발과 집행의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생명·바이오 분야 성장의 기틀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희귀질환자는 여전히 24년 2월 5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를 법률로써 뒷받침하고 불가역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한 “희귀질환자복지법”의 제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건강 약자인 희귀질환자의 사회적 권리와 이를 책임지는 국가의 의무를 기술한 “희귀질환자복지법”은 장애인복지법, 청소년복지법, 노인복지법 등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구성원의 사회적 안전망을 촘촘히 하고 튼튼히 하여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희귀질환이 사라지지 않는 한 희귀질환자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 중환자실이나 수술실을 지옥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고통받는 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보며 해결하려 노력하는 이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정치적 수사에 숨지 않고, 설득하고 여론을 바꾸는 정치 본연의 품격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희귀질환자가 보이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