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제약업계에서는 대상 선정부터 약가, 총액계약, 실제사용근거(RWD) 기반 사후평가까지 제도 전반을 보다 현실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5일 뉴스더보이스 취재를 종합하면, 업계 관계자들은 이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된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시범사업 추진계획'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세부 운영기준이 지나치게 경직될 경우 환자 접근성 확대라는 정책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생명 위협 여부만으로 대상 좁히면 환자 배제"
업계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부분은 대상 약제 선정 기준이다. 현 추진안은 생명을 위협하는 희귀질환 치료제를 중심으로 시범사업 대상을 선정하는 방향이지만, 업계에서는 환자 수뿐 아니라 질환의 중증도와 치료 필요성, 삶의 질 저하 정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생명을 직접 위협하지 않더라도 평생 치료가 필요하고 일상생활에 심각한 제약을 받는 희귀질환이 적지 않은 만큼 '생명 위협' 여부만으로 대상을 제한하면 상당수 환자가 제도 밖에 남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약가 산정 기준도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출시를 포기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을 막기 위해서는 A8 조정최저가의 90% 수준보다 시장 현실을 반영한 가격 체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약가유연계약제를 신속등재와 연계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 다국적 제약사 관계자는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는 환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인데 생명 위협 여부만으로 대상을 제한하면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희귀질환 환자들이 상당수 제외될 수 있다"며 "약가 역시 국내 도입을 유도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되고 약가유연계약제와 연계해 실제 등재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총액계약은 희귀질환 특성 고려해야"
총액계약 운영 방식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업계는 등재 첫해 청구실적만으로 총액을 산정하기보다 1~3년간 실제 사용량과 치료 지속률, 치료 중단률 등을 함께 반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워낙 적어 몇 명만 증감해도 전체 청구액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치료제가 등재된 이후 의료진의 인식 변화나 환자 발굴 확대에 따라 실제 투약 환자가 증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첫해 실적만으로 장기적인 사용량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총액을 초과했을 때 적용하는 환급 방식도 획일적인 전액 환급보다는 초과 규모와 발생 원인, 실제 환자 증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조건부 등재 기간 중 충분한 임상자료가 확보되거나 경제성평가가 가능해질 경우에는 총액계약을 종료하고 일반 등재 체계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다른 다국적 제약사 관계자는 "희귀질환은 환자 수 자체가 적어 몇 명의 환자 변화만으로도 총액 규모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총액계약은 1차년도 실적보다 실제 사용량과 치료 지속률 등을 함께 반영해야 하고 환급 방식도 초과 원인과 규모를 고려한 유연한 구조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속등재보다 사후관리 강화에 초점...실행방안 보완 필요"
한 다국적 제약사 고위 관계자는 이번 시범사업이 당초 희귀질환 환자단체와 정부가 약속했던 '신속등재'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희귀질환 신속등재는 당초 희귀질환연합회 대표가 대통령 면담을 통해 약속받은 공약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안은 선언적 의미는 있지만 실행방안이 뒤따르지 못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심평원 내부적으로도 실제사용근거(RWE) 구축 방안이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100일 안에 등재하겠다는 목표와 데이터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은 현재 희귀질환 신약 평가 절차와 RWE 인프라 수준을 감안하면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사후평가를 통한 약가 조정 방식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효과가 기존보다 우월하게 나타났는데도 약가를 깎겠다는 개념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며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RWE만으로 뚜렷한 효과 개선을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제도를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임상의사들이 직접 효과 데이터를 입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데이터 수집과 효과 평가 자체가 쉽지 않다"며 "사후관리로 약가를 인하하는 부분만 명확하고, 정작 어떻게 신속하게 등재하겠다는 실행방안은 빠져 있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킴리아나 졸겐스마처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초고가 약제를 대상으로 사후평가를 실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희귀질환 치료제 가운데 아직 환자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약제들은 우선 등재에 방점을 찍는 것이 맞다"며 "환자들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고 실제 제약사가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허가·급여 병행이 신속등재의 핵심...확대 시행 필요"
업계에서는 이번 시범사업을 계기로 허가와 급여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는 체계를 보다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희귀질환 치료제뿐 아니라 경제성평가 대상 신약도 허가 신청 단계부터 급여기준 검토와 경제성평가를 병행하면 허가와 급여평가, 약가협상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어 등재 기간을 근본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RWD 기반 사후평가 방식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1~3년차 자료뿐 아니라 사후평가가 실시되는 4년차의 최신 데이터까지 반영해야 평가 결과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 RWD 결과를 바탕으로 급여를 조정하는 기준은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임상성과가 예상보다 우수하고 경제성평가 결과까지 긍정적으로 나타난 경우에는 그 가치가 약가에도 반영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현실적으로 약가 인상이 어렵다면 최소한 기존 약가를 유지하거나 다음 재평가 시점까지 일부 사후관리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다국적 제약사 관계자는 "허가 신청 단계부터 급여기준 검토와 경제성평가를 함께 진행하는 체계가 정착돼야 신속등재가 시범사업을 넘어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며 "RWD 기반 사후평가도 충분한 기간의 데이터를 활용해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하고, 임상적 가치가 확인된 치료제는 그 가치에 맞는 평가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복지부가 건정심에 보고한 시범사업 추진계획에 따르면 대상 약제는 A8 국가 3개국 이상 등재된 희귀질환 치료제 등을 대상으로 별도 선정위원회를 통해 최대 5개 품목을 선정한다. 허가와 급여평가를 병행해 허가 후 1개월 내 약제급여평가위원회 심의를 목표로 하고, A8 조정최저가의 90% 수준에서 약가 협상과 예상청구액 계약을 체결한다.
등재 이후에는 5년간 국내 RWD를 축적해 4년 차에 사후평가를 실시하고, 5년 차에는 임상성과 또는 경제성평가 결과에 따라 약가 유지, 10% 또는 20% 인하, 전액 본인부담 전환 여부 등을 결정한다. 환급액 상한은 최대 300억원으로 설정했으며 예상청구액 재설정 기전도 도입한다.
복지부는 오는 7~8월 대상 약제를 공고한 뒤 9월 최종 선정, 10월부터 신속등재를 추진하고 시범사업 성과를 분석해 제도화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