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선택권 확대·중증 환자 치료공백 해소도 호소
“조용히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게 지나가지는 않겠습니다. 병을 데리고 나들이 갑니다.”
파킨슨병 환자가 자신의 질환을 숨기지 않고 전국을 돌며 인식개선 활동에 나선다. 단순한 홍보 행사가 아니라 환자 본인이 직접 길 위에 서서 질환의 현실을 보여주고, 파킨슨병 환자들이 겪는 치료 환경과 사회적 어려움을 알리기 위한 100일간의 여정이다.
15일 한국파킨슨희망연대 등에 따르면 파킨슨병 진단 4년 차인 유우상(60) 씨는 이날부터 오는 9월 23일까지 ‘파킨슨덕후의 인식개선 캠페인 전국여행 100일’을 진행한다. 유 씨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소속 단체인 한국파킨슨희망연대 이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번 캠페인은 단체가 주관하는 공식 사업이 아닌 개인이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순수 개인 캠페인이다. 운영비 역시 캠페인 취지에 공감한 환우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마련됐다.
유 씨는 “완전히 괜찮아서 나서는 것도 아니고, 두렵지 않아서 나서는 것도 아니다”며 “아직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서 있을 수 있는 지금, 길 위에 서 보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손 떨림만이 아니다”…파킨슨병의 숨겨진 현실 알린다
이번 캠페인의 핵심 목적은 파킨슨병에 대한 사회적 이해를 높이는 데 있다. 유 씨는 파킨슨병이 단순히 손이 떨리는 질환이 아니라 몸과 마음, 일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라는 점을 알리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캠페인에서는 파킨슨병의 대표적 증상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동결(Freezing)’ 증상을 집중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동결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에도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증상이다. 환자는 움직이고 싶지만 몸이 갑자기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 씨는 전국 각지를 방문할 때마다 역과 시장, 광장, 거리 등 시민들이 많이 오가는 공간에서 ‘동결 퍼포먼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환자가 실제로 겪는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시민들에게 직접 보여주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파킨슨병 증상이 단순한 신체 불편을 넘어 사회적 오해와 위축감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느린 동작은 무능하거나 답답한 사람으로, 경직된 몸은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균형장애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마다 다른 치료 필요”…치료 선택권 확대 요구
이번 캠페인은 단순한 인식개선에 그치지 않는다. 유 씨는 파킨슨병 환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치료 선택지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파킨슨병이 대표적인 이질성 질환으로 환자마다 증상과 진행 속도, 약물 반응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어떤 환자는 떨림이 주된 문제인 반면, 어떤 환자는 몸이 굳거나 움직임이 느려지는 증상이 더 심할 수 있다. 약효 지속시간이나 부작용 양상 역시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서는 환자 상태에 맞춰 선택할 수 있는 치료제와 제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유 씨의 주장이다. 그는 특히 파킨슨병 치료의 핵심 약물인 레보도파 제제의 선택 폭이 해외에 비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에서는 환자 상태에 따라 지속형 제제, 응급 오프 상태 대응 제제, 지속주입 치료 등 다양한 치료 옵션이 활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선택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유 씨는 “파킨슨병 치료에는 하나의 정답만 있을 수 없다”며 “환자마다 다른 증상과 생활 리듬을 치료에 반영하려면 더 다양한 치료제와 제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약만으로는 한계”…중증 환자 치료공백 문제 제기
캠페인의 또 다른 목표는 중증 파킨슨병 환자들이 겪는 치료 공백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파킨슨병이 진행되면 경구약만으로 증상 조절이 어려워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약효가 불규칙해지고, 동결 현상과 낙상 위험이 증가하면서 환자의 일상생활은 급격히 제한된다. 걷기와 식사, 외출, 병원 방문 같은 기본적인 활동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
유 씨는 해외에서는 뇌심부자극술(DBS) 외에도 위관 주입치료, 피하 지속주입치료 등 다양한 치료 전략이 검토되지만 국내에서는 실제 선택 가능한 치료 경로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DBS 적용이 어렵거나 적합하지 않은 환자들은 여전히 경구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증 파킨슨 환자의 치료 공백은 개인의 의지나 의료진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최적의 경구 약물 치료에도 일상 유지가 어려운 일부 환자에게는 다음 단계 치료를 검토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국 도심 거쳐 부산~강릉 도보 완주 도전
100일 캠페인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6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는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도심 캠페인이 진행된다. 이후 8월 22일부터 9월 23일까지는 부산에서 강릉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도보 캠페인이 이어진다.
도심 캠페인에서는 서울을 시작으로 강릉, 원주, 충주, 청주, 대전, 익산, 군산, 목포, 순천, 진주, 창원, 대구, 경주,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방문한다. 역과 터미널, 시장, 광장, 공원 등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공간에서 파킨슨병 인식개선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이어지는 도보 캠페인에서는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 경주,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동해, 정동진을 거쳐 강릉까지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파킨슨병 환자의 보행 어려움과 동결 증상, 이동 과정 전반을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
캠페인 기간 동안의 이동 경로와 현장 활동, 동결 퍼포먼스 등은 유튜브 채널 ‘파킨슨덕후’를 통해 공개된다. 유 씨는 이를 통해 파킨슨병 환자가 길 위에서 실제로 겪는 하루를 사회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번 캠페인은 누군가를 대표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한 환자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세상 앞에 서 보는 개인의 기록”이라며 “그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파킨슨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되고, 또 다른 환자에게는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는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