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입증될수록 환급 부담 커져”…감염병·희귀질환 특성 반영 한계도
정부가 희귀·중증질환 치료제의 신속 등재와 약가 유연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이미 운영 중인 위험분담계약제도(RSA)의 손질은 논의에서 비켜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총액제한형 RSA는 신약의 초기 급여 진입을 돕기 위한 장치로 도입됐지만, 등재 이후 임상 근거가 쌓이고 불확실성이 줄어든 뒤에도 계약 조건을 조정하거나 해지할 명확한 통로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7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 3월 발표한 국민건강보험 약가제도 개선방안에는 신약 관련 과제로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방안, ICER 임계값 상향을 중심으로 한 비용효과성 평가 고도화, 약가 유연계약제 도입, 적응증별 약가제 타당성 검토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현재 신약 환자 접근성 개선 장치로 운영 중인 위험분담계약제도 개선 논의는 빠져 있다. 업계에서는 “신속 등재와 약가 유연화를 논의하는 지금이야말로 RSA의 미비점도 함께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게 바로 총액제한형 계약이다.
총액제한형 RSA는 경제성평가 수행이 제한적인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 등에 적용돼 왔다. 환자 수가 적고 대체 치료법이 부족하거나 근거 생산에 한계가 있는 약제의 급여 진입을 지원하면서, 건강보험 재정 부담의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다. 일정 총액상한(CAP)을 설정하고 실제 사용액이 이를 넘어서면 제약사가 초과분을 환급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 장치가 등재 이후에는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실제 임상 사용과 데이터 축적으로 임상적 가치와 비용효과성이 확인돼 초기 불확실성이 감소하거나 해소된 경우에도, 현행 제도에서는 RSA 재평가 시기 전까지 총액상한 조건을 실질적으로 조정하거나 해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총액제한형 RSA가 당초 취지였던 ‘불확실성 관리수단’이 아니라 계약기간 중에는 사실상 ‘상시 규제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불확실성이 해소돼도 총액제한에서 벗어날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부담은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커진다. CAP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임상 현장의 활용도가 높아지면 총액 초과 가능성도 커지고, 그만큼 환급 부담도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효과가 확인되고 의료현장에서 많이 쓰이는 약제일수록 제약사 부담이 커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질환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현재 총액제한형 계약은 환자 수 변동성과 수요 예측 불확실성이 큰 감염병, 희귀질환 등 여러 치료 영역에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 특정 기간 감염 확산, 정부 정책 변화, 임상 환경 변화 등 외부 요인에 따라 약제 수요가 달라질 수 있지만, 이를 계약 구조에 반영할 장치는 사실상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업계는 이런 구조가 장기적으로 의약품 공급 안정성과 혁신 신약의 국내 도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과도한 환급 부담이 누적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등재 전략을 보수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환자의 치료 접근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희귀·중증질환 치료제의 신속 등재와 급여 경로 단축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총액제한형 RSA를 신속 등재의 핵심 수단으로 계속 활용하려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진입 장치는 강화하면서 출구 설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접근성 개선이라는 정책 목표 달성에도 한계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절차상 규정 간 정합성 문제도 거론된다. 건강보험공단 협상지침에는 약제급여평가위원회 평가를 거쳐 총액제한형 계약을 변경하거나 해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반면 심사평가원 관련 규정은 계약 종료 시점에서만 평가와 협상이 가능하도록 정하고 있어, 계약기간 중 조건 변경이 사실상 차단돼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계약 기간 중이라도 임상근거 확보, 실제 사용자료 축적, 비용효과성 확인 등을 통해 초기 불확실성이 해소된 경우 총액제한 계약을 변경하거나 해지할 수 있도록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단순히 재평가 시점까지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변화에 따라 계약 조건도 조정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신속 등재 논의가 확산될수록 진입(Entry)만큼이나 출구(Exit) 설계가 중요해진다”며 “총액제한형 위험분담제가 접근성 지원 수단으로 남으려면 불확실성 변화에 따라 계약 조건이 조정되는 동적 운영 체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