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전반 구조적 보완 시급”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한 ‘약가제도 개선방안’을 두고 의약품 급여정책과 가치평가 분야의 전문가들이 강한 우려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번 개선안이 환자 접근성과 산업 육성에만 초점을 맞춰 약가제도의 핵심 축인 ‘재정 지속가능성’을 배제했으며, 평가 축소 중심 접근은 건강보험 재정과 산업 생태계 모두를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선등재 후평가 방식의 구조적 한계, ICER 임계값 상향 근거 부족, 제네릭 약가정책 실효성 미흡, 약가 유연계약제 확대의 위험성 등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의약품 급여정책과 의료기술의 가치를 연구하는 연구자 일동(13인)'은 4일 뉴스더보이스에 전달한 '전문가 의견서: 2025년도 제22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부의 안건 “약가제도 개선방안”에 대한 의견'을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재정 지속가능성 빠진 정책 비전…고가 약제 증가 현실 반영 부족
연구자들은 정부가 제시한 비전이 ‘환자 접근성 강화’와 ‘제약산업 혁신 성과 창출’에만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 추진 배경에서는 고령화로 인한 약품비 부담 증가와 재정 지속가능성 위기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정작 정책 비전과 목표에서는 재정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2024년 약품비가 27조원 규모에 달했고, 고가 항암제 지출이 2020~2023년 사이 연평균 12.9% 증가했다는 점을 제시하며 “가격관리 방향 없이 가산 확대 중심으로 설계된 개선안은 약가제도의 정합성과 재정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선등재 후평가 방식, 실행 가능성 낮고 구조적 위험 커
정부가 희귀질환 치료제의 신속등재(100일)를 추진하면서 사후평가 강화를 제시했지만, 연구자들은 평가 주기·방법·조치 기준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국내 급여결정 과정에서 등재 이후 가격 조정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경험을 외면하고 있다”며 “해외에서도 등재 후 평가 결과가 약가 조정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가 급여적정성 재평가 범위를 ‘재평가 필요성이 뚜렷한 약제 중심’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사전평가 완화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사후평가 역시 축소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AI 기반 실사용데이터(RWD)를 활용한 평가 강화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은 “AI 기술이 RWD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한다는 근거가 없다”며 실효성을 문제 삼았다.
ICER 임계값 상향 추진 근거 부족…탄력 적용과 상향 구분해야
비용효과성 평가 임계값(ICER) 상향 검토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은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여러 국내외 연구에서 오히려 현행 임계값이 적정 수준보다 높다는 분석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연구자들은 “중증·희귀질환에서 탄력적 적용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전반적 임계값 상향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며, WHO도 GDP 대비 임계값 기준을 더 이상 권고하지 않는 점을 언급했다.
약가 유연계약제 확대, 투명성·행정 부담·재정 위험 우려
정부가 약가 유연계약제(환급형 계약)를 신약뿐 아니라 오리지널·바이오시밀러 대부분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은 우려를 제기했다.
연구자들은 ▲공급 안정성이 이미 확보된 오리지널 약제에 환급제를 적용할 근거 부족, ▲대체제가 많은 일반 신약·바이오시밀러까지 포함하는 정책적 논리 부재, ▲제도 확대 시 약가 결정 과정의 투명성 저하, ▲위험분담제의 기능 약화, ▲행정비용 급증 가능성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한 표시가를 A8 최고가 이내 수준으로 산정하면서도 환자 본인부담 증가 가능성 및 건강보험 재정 영향에 대한 분석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문제로 꼽았다.
적응증별 약가제 도입 시기상조…현장 적용 가능성 낮아
정부가 검토 중인 적응증별 약가제에 대해서는 “현 시점 도입은 무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구자들은 △적응증별 사용량 파악의 기술적 어려움 △의료기관·약국 시스템 복잡성 증가 등을 이유로 들었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2025년 7월 공식적으로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어, 현장과 실무 기관의 우려를 정부가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네릭 약가인하 효과 제한적…“시장 구조 문제 해결이 먼저”
연구자들은 제네릭 약가 산정률을 현행 53.55%에서 40%대로 조정하는 방안도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제네릭 시장의 근본 문제는 “비싼 제네릭이 더 많이 처방되는 역전 구조”에 있는데, 후발 제네릭 가격만 낮추는 방식으로는 전체 성분군 약가를 낮추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2020년 계단식 약가제가 재도입된 이후 실제 재정효과가 제한적이었던 점을 들어 “시장 구조 혁신 없이 단순 가격 조정만으로는 재정절감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평가 줄일 게 아니라 강화해야…선별등재제도 20년, 재정비 필요”
연구자들은 “혁신 신약 접근성 강화는 필요한 목표지만, 이를 위해 약가를 높게 설정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평가 생략이 아니라 평가 인프라·평가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선별등재제도 도입 20년을 맞아 평가 체계를 고도화하고 제약산업과 건강보험 재정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 의견서를 배은영 상지대 교수가 초안을 잡았고, 모두 13명이 동의해 이름을 함께 올렸다. 연명에 참여한 연구자는 가나다 순으로 권혜영(목원대학교), 김윤희(인하대학교), 김진현(서울대학교), 배승진(이화여자대학교), 배은영(경상국립대학교), 양봉민(서울대학교), 유수연(강원대학교), 이상일(울산대학교), 이태진(서울대학교), 이혜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조은(숙명여자대학교), 허순임(서울시립대학교), 홍지형(가천대학교)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