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느낌에서...환우들이 울분을 표할 공간이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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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느낌에서...환우들이 울분을 표할 공간이 없었구나"
  • 양민후 기자
  • 승인 2020.03.02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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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선협회 김성기 회장

한 청년이 대학병원 피부과 진료실 대기의자에 앉는다. 그보다 먼저 와서 자리잡은 환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쳐다보고 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들 중 일부는 그와 같은 건선환자일 것이라고. 청년의 머리 속엔 지난 기억들이 떠오른다. 목욕탕에선 울긋불긋한 몸 때문에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선 상의를 탈의해야 하는 신체검사날이 두려웠다. 한 여름에도 긴팔을 고수해야 했다. 이성관계 역시 시련이 뒤따랐다. 청년은 다른 건선환우들도 이런 상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한국건선협회 김성기 회장(50)은 그렇게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서울 대방동 소재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참 허공을 응시하더니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안경을 고쳐쓰는 그의 손에선 건선이란 병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머리를 정리할 때 살며시 드러난 손목에서도 그가 건선과 싸우고 있다는 흔적이 보였다. 김 회장은 몸을 기울여 깍지를 끼며,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때 느꼈습니다. 환우들이 울분을 표할 공간이 없었구나"

"건선환자들이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1999년 온라인상에 카페를 개설했죠. 첫 오프라인 모임에는 20명쯤 나왔어요. 함께 밤을 지새며 대화를 나눴죠. 동병상련 때문인지 금방 친해졌어요. 그때 느꼈습니다. 환우들이 울분을 표할 공간이 없었구나."

온라인 카페는 한국건선협회의 모태가 됐다. 건선협회는 지난 2017년, 3년여의 논의를 거쳐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정식 회원이 됐다. 김 회장은 현재 용인시 소재 보건소에서 주무관으로 시민건강증진을 위한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생물학, 운동생리학, 인간행동과학, 보건정책 전공 등을 두루 섭렵한 게 업무와 환우단체 운영에 큰 도움됐다고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비상근무에 투입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도 저녁에 비상근무가 잡혀있어요. 직업과 협회 일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죠. 그래서 주말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어요. 금전적으로도 희생을 많이 감수했죠. 무엇 때문에 돈 안되는 활동을 하느냐는 말과 함께 재정 운영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어요. 하지만 비영리단체인 환자단체연합회의 일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재정 투명성입니다."

김 회장에게 가족은 큰 힘이다. 아내와 아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한다. 특히 아내는 협회 일이라면 전적으로 이해하고 배려해준다. 숱한 위기에도 한국건선협회가 좌초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버팀목이다.  

"차라리 아토피라고 설명해요. 감염될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없으니"

"보람찬 일도 많았죠. 경험상 건선환자들은 혼인율이 낮아요. 그런데 협회 모임에서 커플이 10쌍 이상 탄생했어요. 한 번씩 자녀들도 데리고 나오는데 모두 건강하더군요. 또 건선환자들은 우울증 유병률이 높아요.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회원 분들은 협회가 이런 충동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고마움을 전했어요.”

김 회장은 건선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건선이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비전염성 만성 피부질환'이란 사실은 대중에게 여전히 낯설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차라리 아토피 환자라고 설명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최소한 옮을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건선은 아토피처럼 전염성이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르시더군요. 이런 인식부터 개선해 나갈 생각입니다. 의료진과 협업해 목소리를 내는 방향을 구상 중이예요. 2030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캠페인도 진행할 겁니다. SNS를 이용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고, 최근에는 오래 묵혀둔 유튜브 채널도 재가동했어요.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문화를 접목한 방법도 고려하고 있어요.”

그는 건선을 치료하는 환경에서 눈을 돌렸다. 일정기간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로서는 직장 등에서 제약이 많다는 것이다. 

"일단 생물학적제제가 산정특례 적용되면서 한 고비는 넘겼어요. 단 3개월 이상 광선치료에도 효능을 보지 못한 경우라는 조건이 붙었죠. 회사원은 일정에 따라 광선치료 받으려면 반차를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 고용주가 좋아하지 않겠죠. 자연스레 인사고과에 영향을 받는게 현실입니다. 이런 치료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환자단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환자단체, 재정 투명성이 중요...큰 목소리는 인재로부터

김 회장은 환자의 권리증진을 위해선 단체의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후원금 및 회비 등 재정에 대한 투명성 없이는 단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견해다. 이를 위해 한국건선협회는 지난해부터 사단법인화를 추진 중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원이 된 이후에는 더욱 엄격한 원칙에 따라 재정 투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안내했다.

궁극적으로는 회비화 구조를 고려하고 있다. 외부 이해관계자의 후원금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방안이다. 그래야만 눈치보지 않고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김 회장은 회비와 관련해 회원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있다. 재정이 충분히 확보되면 인재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그다. 적합한 인재를 고용하기 위해선 대기업 급여의 120%라도 지불하겠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인력과 함께 해야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환자 중심의 정책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합당한 금액을 지불할 필요가 있어요. 결국 환자단체의 재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는 환자단체에서 일한 경력이 향후 진로에 플러스되는 환경도 조성돼야 합니다."

김 회장은 회장직을 맡은 지 10년쯤 됐다. 앞으로의 할 일은 단체를 보다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회원들한테 항상 말합니다. 장기독재체제를 풀어달라고(웃음). 저의 목표는 분명해요.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이죠. 후임자가 완벽한 체계에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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