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17일은 세계혈우연맹(WFH)이 제정한 ‘세계 혈우인의 날’이다. 혈우병 환자의 치료 접근성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이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치료의 역사와 그 한계를 동시에 돌아보게 한다.
이 기념일의 출발점에는 캐나다의 혈우병 환자였던 프랭크 슈나벨이 있다. 그는 치료도, 정보도 부족했던 시대에 환자들이 국가별로 고립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1963년 세계혈우연맹을 설립했다. 연결은 곧 생존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연결은 지금까지 혈우병 치료 환경을 바꿔온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혈우병은 혈액 내 응고인자가 부족하거나 결핍돼 출혈이 쉽게 멈추지 않는 선천성 희귀질환이다. 대표적으로 A형(제8인자 결핍)과 B형(제9인자 결핍)으로 구분되며, 작은 외상에도 출혈이 지속되거나 관절·근육 내 출혈이 반복될 수 있다. 치료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으면 관절 손상과 장애로 이어질 수 있지만, 조기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이뤄질 경우 정상에 가까운 일상생활도 가능하다. 결국 이 질환은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는 질환이다.
치료의 진화, '생존에서 삶으로'
수십 년 전만 해도 혈우병은 ‘관리’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응고인자 치료제가 충분히 보급되기 전에는 작은 외상에도 출혈이 멈추지 않아 생명을 잃는 일이 반복됐다. 관절 내 출혈이 누적되며 장애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치료는 출혈이 발생한 뒤에야 이뤄지는 ‘사후 대응’이었고, 의료 환경에 따라 환자의 생존 자체가 좌우됐다. 이 시기 혈우병 환자의 평균 기대수명은 일반인에 비해 크게 낮았다.
혈우병 치료 환경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응고인자 제제의 발전과 보급 이후다. 출혈 시 보충하던 방식에서 나아가, 일정 주기로 투여해 출혈 자체를 예방하는 ‘예방요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환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출혈 빈도가 줄고 관절 손상이 예방되면서, 환자들은 학교에 다니고 직장을 갖는 등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출혈을 견디는 삶’에서 ‘출혈을 관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었다.
최근에는 치료가 다시 한 번 진화하고 있다. 예방요법을 넘어 환자 개개인의 약물 반응과 생활 패턴을 반영하는 개인 맞춤형 치료가 강조되고, 장기 지속형 치료제와 다양한 치료 옵션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다케다제약이 ‘세계 혈우인의 날’을 앞두고 진행한 사내 행사에서 제시된 ‘진단 이후의 케어’라는 화두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의료진 강연과 환우 참여 세션을 통해 장기 관리의 중요성과 환자의 실제 삶이 공유됐고, 치료의 목표가 단순한 지혈을 넘어 일상 회복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환자단체인 한국코헴회 역시 개인 맞춤형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치료가 학업과 직장, 사회활동 등 실제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공유했다.
남은 과제, 제도와 인식의 간극
문제는 치료 환경의 변화가 정책과 제도, 그리고 사회 인식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의원과 한국코헴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예방 중심 치료, 장기 관리, 개인 맞춤형 치료 등 변화된 패러다임을 제도가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 필요성이 제기됐다. 치료는 ‘진단 이후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제도는 여전히 ‘출혈 관리’ 중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또 다른 과제는 보이지 않았던 환자들이다. JW중외제약이 여성 혈우병 환자와 보인자를 위한 교육용 콘텐츠를 제작한 것은 그동안 소외돼 온 영역을 보여준다. 여성 환자 역시 출혈 증상을 겪고 있지만 정보 부족과 인식의 한계로 적절한 진단과 관리에서 뒤처져 왔다.
질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치료 접근성으로 이어진다. 인식 개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과제다. 한편 GC녹십자가 진행하는 환아 소원 성취 캠페인은 치료의 개념이 어디까지 확장돼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출혈 관리에 그치지 않고 환아의 정서 회복과 삶의 동기를 지원하는 접근은 치료의 본질이 ‘삶’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세계 혈우인의 날'은 묻는다. 우리는 어디까지 왔고,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 프랭크 슈나벨이 시작한 연결은 치료 환경을 바꿨지만, 그 변화가 모든 환자에게 동일하게 도달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치료의 발전을 삶의 변화로 완성하는 일이다.
'세계 혈우인의 날'은 기념이 아니라 점검의 날이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약속의 날이어야 한다. 환자가 출혈을 넘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의 날로 새겨지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