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단체 “입법 취지 이해하지만, 구조적으로 피해자 권리 약화 우려”
의료사고 수사특례·형사특례를 도입하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의료현장 안정화와 환자 권리 보장 사이의 긴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정부와 일부 의료계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형사적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입법 구조 자체가 환자 권리를 구조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필수의료 관련 의료사고에 대해 수사, 기소, 형벌 단계에서 각종 특례를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환자단체는 필수의료 범위 설정 방식, 중대한 과실 중심 수사 구조, 손해배상 시 공소제기 제한, 의료사고심의위원회 신설, 무과실 보상 확대 등 여러 조항이 결합될 경우, 의료사고 피해자의 형사적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 통로가 전반적으로 좁아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뉴스더보이스는 9일 오전 열린 '의료사고 수사특례와 형사특례 규정을 포함한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 관련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기자간담회' 자료를 토대로 쟁점사항을 정리해 봤다.
“필수의료, 시행령에 맡기면 특례가 원칙 된다”
“응급·외상·분만·중증소아로 법에 못 박아야”
가장 큰 쟁점은 ‘필수의료’ 범위 설정이다. 김윤·한지아·박희승 의원안은 모두 필수의료 관련 의료사고에 대해 특례를 적용하도록 설계돼 있지만, 필수의료의 구체 범위는 대통령령이나 보건복지부 장관 고시 등 하위법령에 위임하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이를 두고 “입법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 설정 책임을 행정부에 넘긴 것”이라고 비판한다. 형사특례는 국민 기본권과 직결되는 중대한 예외 규정인 만큼, 적용 범위는 법률 차원에서 명확히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윤 의원안은 중증소아응급, 분만, 외상 등을 예시로 들고 있으나, 구체 범위는 복지부 장관이 정하도록 하고 있다. 한지아·박희승 의원안 역시 응급환자 진료와 중증질환을 포함하되, 구체 내용은 대통령령에 위임하는 구조다.
환자단체는 “이렇게 되면 심혈관·뇌혈관 질환, 암, 희귀·난치질환, 고난도 수술 전반까지 사실상 대부분의 의료행위가 필수의료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필수의료로 분류되는 순간, 수사특례·형사특례·공소제기 제한 등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는 형사절차를 통한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의 문턱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형사특례는 예외 규정이므로, 적용 범위를 최대한 좁게 설정해야 한다”며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범위는 응급·외상·분만·중증소아 정도이며, 이를 법률에 직접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행령에 맡기겠다는 것은 향후 정책 기조에 따라 필수의료 범위가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환자단체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근무 환경 개선, 수가 인상, 인력 확충 등 구조적 대책이지, 형사특례 확대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형사책임 완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경우, 피해자 권리만 약화되고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대한 과실 중심 수사, 형법 체계와 정면 충돌”
“업무상과실·인과관계 중심 수사가 원칙”
개정안은 의료사고 수사 구조를 ‘중대한 과실’ 여부 중심으로 재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환자단체는 이를 두고 “현행 형법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지적한다.
현행 형법상 의료사고는 주로 업무상과실치사상죄 틀 안에서 다뤄진다. 과실의 경중은 양형에서 고려되며, 수사와 기소 단계에서는 먼저 과실 존재와 인과관계가 핵심 판단 대상이다. 사망이나 중상해라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한 경우, 중대한 과실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수사는 원칙적으로 개시된다.
그러나 개정안은 중대한 과실이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수사·기소·형벌 단계에서 특례를 적용해 형사책임을 크게 제한하는 구조를 도입하고 있다. 환자단체는 “수사 초기 단계에서 과실의 경중을 선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렵고, 진실 규명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안기종 대표는 “의료사고는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어서, 수사 초기에 과실의 경중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중대한 과실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사실상 수사가 제한되는 구조는 진실 규명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단체는 특히 진료기록·영상자료 관련 위법행위를 중대한 과실 범주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료사고 피해자와 유가족이 형사고소를 선택하는 중요한 이유는 단순 처벌이 아니라, 사고 경위를 밝히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기록 조작, 미작성, 영상자료 미제출 등이 특례 대상이 될 경우, 진상 규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단체 관계자는 “진료기록은 의료사고의 거의 유일한 객관적 증거”라며 “기록 조작이나 은폐는 단순 과실이 아니라, 사법 정의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손해배상하면 공소제기 불가…“형사책임 거래화 우려”
일부 개정안에는 손해배상이 이뤄진 경우, 필수의료 관련 의료사고에 대해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환자단체는 이에 대해 “사망 의료사고에서조차 손해배상만으로 형사책임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권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주장한다.
환자단체는 “형사사건에서 합의 여부는 양형에 반영될 수는 있지만, 공소 제기 자체를 막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지적한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의료기관이나 대형 병원일수록 형사책임에서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형사사법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된다.
안기종 대표는 “돈을 지급하면 공소 제기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구조는, 피해자 권리를 거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형사책임과 민사적 손해배상은 원칙적으로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사고심의위원회 신설…“초기 수사 지연·증거 확보 차질”
개정안은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신설해, 필수의료 여부와 중대한 과실 해당 여부 등을 심의하도록 하고 있다. 심의 기간 동안 경찰과 검찰에 의료인 소환을 자제하도록 요청할 수 있도록 한 점도 포함돼 있다.
환자단체는 이 제도가 사실상 수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안기종 대표는 “초기 수사 단계는 진실 규명과 증거 확보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며 “심의 기간을 이유로 소환과 수사가 지연될 경우, 피해자 입장에서는 결정적 증거 확보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진료기록, 관계자 진술, CCTV·영상자료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보가 어려워지는 만큼, 초기 수사 지연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심의위원회가 ‘기소 자제 요청’까지 할 수 있도록 한 구조 역시 “검찰의 기소권 독립성과 형사사법 원칙에 어긋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무과실 보상 확대 논란…“제도 취지 왜곡 가능성”
현재 분만 의료사고에 한해 적용되는 불가항력 무과실 보상을 응급·외상·중증소아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환자단체는 “무과실 보상은 원칙적으로 손해배상이 인정되지 않는 예외적 제도”라며, 적용 범위 확대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분만 의료사고 무과실 보상 상한이 3억 원으로 인상된 상황에서, 적용 범위를 확대하면 무과실 보상을 받기 위한 형사고소가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환자단체 관계자는 “단순과실이나 중대한 과실로 판단되면 손해배상액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기 때문에, 무과실 보상을 받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설명의무·트라우마센터 등은 긍정 평가
“...그러나 책임을 대체해선 안 돼”
의료사고 설명의무 강화, 유감 표명에 대한 증거능력 배제, 피해자 트라우마센터 설치 등 ‘소통 강화’ 조항에 대해서는 환자단체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충분한 설명과 공감, 심리적 지원은 분쟁 예방과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환자단체는 이러한 장치가 수사와 책임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동희 군의 어머니 김소희 씨는 “사고 이후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상처였다”며 “설명과 소통이 제도로 보장되는 것은 의미 있지만, 그것이 수사와 책임을 대신하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