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소비자, 전체 이용자로 확대 촉구…등록·추적제도 마련 제안
비대면진료 처방 의약품의 배송 범위를 놓고 약사사회와 환자·소비자단체가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대한약사회는 국회가 합의한 취약계층 중심의 제한적 재택수령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반면 환자·소비자단체들은 모든 비대면진료 이용자에게 배송 선택권을 보장하되, 운송기준과 등록·추적체계 등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양측 모두 환자 안전과 의약품 오남용 방지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다만 약사회는 관련 관리체계가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송부터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고, 환자·소비자단체는 배송을 제한하기보다 제도화를 통해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사회 “국회가 정한 제한적 배송 원칙 지켜야”
대한약사회는 9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국민건강권 사수 비상대책위원회’ 발대식을 열고 의약품 배송 대상 확대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발대식에는 권영희 대한약사회장과 비대위 공동위원장, 16개 시도지부장, 비대위 각 팀장과 팀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약사회는 기존 ‘비대면진료 제도화 대응 태스크포스(TF)’를 확대·재편해 비대위를 구성했다.
현행 의료법상 올해 12월 시행 예정인 비대면진료 처방 의약품 재택수령 대상은 섬·산간·벽지 거주자, 장기요양급여 수급자, 등록장애인, 감염병 환자, 희귀질환자 등 5개 유형으로 제한돼 있다.
약사회는 비대면진료 제도화가 국회와 보건의료계, 시민사회가 대면 원칙과 환자 안전을 우선해 마련한 사회적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관련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정부가 재택수령 대상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국회의 입법 결정을 무시하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는 조치라는 주장이다.
의약품 전달은 일반 상품의 운송과 달리 투약 과정의 일부라는 점도 내세웠다. 처방전 위·변조를 막을 공적 전자처방전달시스템과 비대면진료 지원시스템, 취약지역을 지원할 공적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송 대상을 확대하면 환자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비급여 처방과 조제 의약품 배송 실태에 관한 객관적인 통계나 체계적인 부작용 평가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했다. 배송 전면 허용이 불필요한 의료 이용과 의약품 오남용을 늘려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권영희 회장은 “의약품 배송은 국민 안전과 직결된 문제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국회가 정한 제한적 배송 원칙은 반드시 엄격하게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약사회는 비대위를 중심으로 9만 약사의 역량을 총동원해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을 막아낼 것”이라며 “보건의료의 대면 원칙과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어떠한 시도와도 타협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대위는 정부와 플랫폼 업계의 일방적인 제도 추진을 저지하고 국민·환자 안전과 보건의료 공공성 측면에서 정책의 문제점을 알리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국회 및 시민사회와의 공조도 강화하기로 했다.
환자단체 “진료부터 의약품 수령까지 연결돼야”
같은 날 한국소비자연맹과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소비자시민모임,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로 구성된 ‘의약주권 환자·소비자연대’는 의약품 배송을 함께 제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연대는 성명을 통해 비대면진료 처방 의약품의 재택수령 대상을 모든 비대면진료 이용자로 확대해 소비자의 의료·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비대면으로 진료와 처방을 받고도 의약품을 받기 위해 약국을 방문해야 한다면 제도 도입에 따른 편익이 크게 줄어든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의약품 배송은 산업 활성화나 플랫폼 사업자의 이해관계가 아닌 환자와 소비자의 의료·의약품 접근권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대는 현행 5개 유형만으로는 실제 배송이 필요한 환자를 충분히 포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항암치료로 면역력이 떨어져 외출이 위험한 암 환자와 장기요양 등급을 받지 못한 거동 불편 고령자, 수술·골절 환자, 영유아 보호자, 직장인·교대근무자, 돌봄 가족 등을 현행 재택수령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다섯 가지 유형의 열거는 환자의 실제 필요가 아니라 행정적 범주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며 “배송의 안전성은 환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의약품의 특성과 배송체계 수준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보건복지부가 환자·소비자단체와 진행한 간담회에서 1형 당뇨병 환자와 장애인단체가 비대면진료와 의약품 배송을 함께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의약품 배송 요구를 플랫폼 기업의 사업 확대 요구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용 강제 아닌 선택권 확대”
연대는 의약품 배송을 의료취약계층에게만 필요한 서비스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육아와 돌봄, 직장생활, 지역 간 의료격차 등으로 의료기관과 약국 방문에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일반 소비자에게도 유용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비대면진료가 허용된다고 모든 환자가 비대면진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의약품 배송이 허용된다고 모든 환자가 배송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환자가 대면진료와 비대면진료를 선택하는 것처럼 의약품도 약국 방문수령과 배송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대면진료에 동일 증상 대면진료 이력과 초진 지역, 처방 가능한 의약품과 기간, 의료기관 종별·비율 등의 제한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의약품 수령 방식까지 지나치게 제한하면 실제 이용이 어려운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안전관리 해법, ‘선행 구축’과 ‘제도화’로 갈려
양측은 배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도 입장차를 보였다.
약사회는 공적 전자처방전달시스템과 비대면진료 지원체계를 먼저 구축하고 안전성과 부작용에 대한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비대면진료 플랫폼의 의약품 도매업 겸업을 금지하는 약사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정부가 배송 확대 방침을 내놓은 데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영리 플랫폼에 대한 특혜이자 보건의료 공공성을 훼손하는 조치라는 주장이다.
환자·소비자연대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배송을 금지할 근거가 아니라 이를 관리할 제도를 마련해야 할 이유라고 맞섰다.
연대는 온도관리가 필요한 의약품과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 오남용 우려 의약품 등에 엄격한 관리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탈모·다이어트·여드름 치료 등 비급여 의약품의 무분별한 처방을 막기 위해 오남용 우려 의약품과 초진 처방이 부적절한 의약품을 처방 단계부터 관리하고, 필요한 경우 배송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복약지도는 전화나 화상으로 실시하고, 의약품을 받은 뒤 사후상담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배송업체 등록·전 과정 추적체계 요구
환자·소비자연대는 배송업체 등록제를 도입하고 온도관리 설비와 종사자 관리, 오배송·분실 방지, 조제부터 수령까지의 전 과정 추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운송 중 사고에 대한 배송업체의 책임과 위반 시 처벌규정도 법률에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플랫폼이 특정 의료기관이나 약국을 우대하거나 특정 의약품의 처방을 유도하는 행위는 금지하고, 환자가 약국을 직접 선택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송업체 선택 권한을 약국에만 부여하는 방식에는 반대했다. 약국이 배송업체를 지정하면 특정 업체 몰아주기와 담합, 배송비 인상 우려가 있고 그 부담이 환자와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등록된 배송업체 가운데 환자와 소비자가 원하는 업체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연대는 국회에 재택수령 대상을 전체 비대면진료 이용자로 확대하고 배송업체 등록제와 위반 시 처벌규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정부에는 의약품 특성에 따른 운송기준과 배송업체 등록·관리체계, 조제부터 배송·수령까지 추적 가능한 시스템, 본인 또는 대리인의 수령 확인, 사고 발생 시 책임주체, 전화·화상 사후상담 등의 세부기준을 하위법령에 담으라고 촉구했다.
연대는 “비대면으로 진료받고 처방까지 받은 환자에게 약을 받기 위해 다시 이동하라고 하는 것은 비대면진료의 취지를 스스로 무력화하는 것”이라며 “안전은 배송을 막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안전한 의약품 배송제도를 만들기 위한 기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비대면진료가 국민이 실제로 이용하기 어려운 ‘반쪽짜리 제도’가 되지 않도록 의약품 배송을 함께 제도화해야 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