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약물관리 기반 약화 우려…공공심야약국 전면 확충 촉구
약사들로 구성된 보건시민단체가 모든 비대면진료 환자로 약 배송 대상을 확대하려는 정부 논의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충분한 안전성 평가 없이 배송부터 확대하면 의약품 오남용을 부추기고 지역약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약물 안전망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는 24일 ‘비대면진료 약 배송 전면 확대 논의를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의약품 안전과 지역약국을 영리 플랫폼에 넘길 수 없다”고 밝혔다.
건약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와 중소벤처기업부, 국무조정실은 지난 20일 비대면진료 약 배송 대상을 모든 환자로 확대하는 논의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개정 의료법 시행을 넉 달 앞두고 법률이 제한적으로 규정한 배송 대상을 넓히려는 움직임이라는 게 건약의 설명이다.
“배송 편의보다 적정 사용·안전관리 우선해야”
건약은 국내 의약품 사용량과 의료 이용 수준이 높은 상황에서 약을 더 쉽고 편리하게 받도록 하는 데만 정책의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건약은 ‘OECD 보건통계 2026’을 인용해 2024년 국민 1인당 의약품 판매액이 회원국 평균의 약 1.5배, 외래진료 횟수는 2.7배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항생제 사용량과 고령층 다제약물 처방도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따라서 의약품 접근성 확대는 적정 사용과 안전한 약물관리 방안과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건약은 약 배송을 통한 접근성 보장이 우선 필요한 대상은 물리적·기능적 제약으로 약국을 이용하기 어려운 환자들이라고 강조했다. 개정 의료법이 배송 대상을 섬·벽지 주민과 장기요양수급자, 장애인, 감염병 환자, 희귀질환자 등으로 한정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의약품 사용의 안전성과 적정성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은 채 모든 비대면진료 환자로 약 배송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대면진료가 다이어트약과 탈모약 등 비급여 의약품을 손쉽게 처방받는 통로로 활용돼 왔다는 점도 문제로 제시했다.
건약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근거로 여드름 치료제 이소티논의 비대면 처방 점검량이 2년여 만에 126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임부 금기 성분이 플랫폼의 평점과 후기 경쟁 속에서 처방돼 왔다며, 정부가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전에 약 배송 대상 확대부터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회도 개정 의료법 제안이유에서 비대면진료의 수도권 쏠림과 비급여 의약품 처방 문제를 지적하고, 사회적 우려 해소와 안전성 강화를 입법 목적으로 제시했다는 게 건약의 설명이다.
건약은 개정 의료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배송 대상 제한을 완화하려는 것은 법률의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선 비대면진료 시범사업 기간 축적된 처방자료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플랫폼 노출 정책이 이용 약국 좌우할 수도”
약 배송 확대가 지역약국과 의약품 전달체계에 미칠 영향도 우려했다.
건약은 배송 대상이 모든 환자로 넓어지면 진료와 처방, 조제, 의약품 전달이 하나의 민간 영리 플랫폼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환자가 어느 약국을 이용할지 플랫폼의 노출 정책이 사실상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하위법령으로 비대면진료 전담약국을 금지하더라도 특정 약국을 직접 지정하지 않고 노출 순위나 수수료 조건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조제 물량이 소수 약국에 집중될 수 있다고 했다. 지역약국도 플랫폼 처방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 구조로 재편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건약은 전국 2만5000여개 지역약국이 별도의 재정 투입 없이 주민 가까이에서 일차보건의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역약국이 주민의 복약 이력을 축적하고 중복투약과 약물 상호작용을 점검하며 만성질환자의 복용 상태를 지속해서 관리한다는 설명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통합돌봄과 방문약료, 다제약물 관리도 지역약국 기반에 의존하고 있다고 했다. 약 배송 전면 확대는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한 통합돌봄과 ‘한국형 주치의 모델’이 활용해야 할 지역 약물관리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공심야약국 확대도 촉구했다. 건약은 취약 시간대 의약품 접근성을 보장하는 공공심야약국이 2026년 4월 기준 전국 242곳이고, 연간 예산은 57억원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건약은 정부에 ▲비대면진료 시범사업 기간 축적된 처방자료 평가·공개 ▲모든 비대면진료 환자를 대상으로 한 약 배송 확대 논의 중단 ▲개정 의료법이 정한 배송 대상 제한의 하위법령 반영 ▲통합돌봄과 한국형 주치의 모델에 약물관리 연계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추진전략의 의약품 대책 재수립 ▲공공심야약국 전면 확대 등을 요구했다.
건약은 “개정 의료법은 아직 시행되지도 않았다”며 “법이 무엇을 우려해 배송 대상을 한정했는지, 그 우려가 해소됐는지 확인하는 일이 먼저”라고 밝혔다.
이어 “의료는 민간 영리 플랫폼의 사업 동력이 아니며 국민이 안전하게 의약품을 사용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며 시민사회와 함께 정부의 행보를 감시하고 대응하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