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6개 품목 집중관리·사재기 엄단”…일일 점검 체계 가동
유통 구조 불투명·보고체계 한계…“단속만으론 효과 제한” 지적
전문가 “공급망 재설계 없인 반복”…단기 처방 넘어 구조개선 필요
중동 전쟁 장기화 여파가 국내 의료현장까지 번지면서 주사기와 수액세트 등 필수 의료소모품을 둘러싼 사재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당장 환자에 직접 피해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장기화활 경우 과거 코로나 시절 마스크 사태와 같은 상황이 번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부의 집중단속 천명에도 불구, 업계에서는 유통 구조 자체가 불투명해 정부 대응에 실효성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향후 사태추이가 주목된다.
8일 보건당국과 의료산업계에 따르면, 이번 의료소모품 사재 사태의 출발점은 원료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석유화학 기초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흔들리면서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등 플라스틱 원료 가격이 급등했고, 이는 곧바로 수액세트, 주사기, 시럽병 등 의료소모품 생산 부담으로 이어졌다. 특히 수액백과 주사기 등은 대체재 확보가 어려운 필수 품목이라는 점에서 공급 차질 우려가 의료현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선제 대응에 나섰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보건당국은 물론 산업부 등이 모두 나서 수액세트, 수액제 포장재, 주사기, 주사침, 점안제 용기 등 주요 품목을 중심으로 생산·재고·유통 상황을 매일 점검하는 체계를 가동 중이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유가 상승과 나프타 등 원료 공급 불안이 의료제품 생산과 유통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의료현장에서 수급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계부처가 총력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특히 사재기와 가격 담합 등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해 강경 대응 방침을 분명히 했다. 정 장관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불안 심리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공급망 안정성을 해치는 요인”이라며 “의료제품 관련 사재기와 담합 등 불공정 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역시 제도적 대응을 병행하고 있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포장재 변경 등 허가 절차를 신속화해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고 있다”며 “의료현장에서 필요한 제품이 적시에 공급될 수 있도록 규제 측면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정부 기대와는 온도 차가 있다. 업계에서는 사재기 단속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의료기기 업계 관계자는 “제조 단계에서는 공급량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도매상이나 온라인 유통 채널까지는 추적이 어렵다”며 “누가 얼마나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특히 현재 유통 정보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식약처는 의료기기통합정보시스템을 통해 유통 정보를 표준코드 기반으로 보고받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보고 체계 자체가 미비한 상황에서 단속만 강화하면 보여주기식 대응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요 측면에서도 불안 요인이 커지고 있다. 공급 부족 우려가 확산되면서 일부 의료기관이 선제적으로 물량 확보에 나서는 ‘가수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공급 부족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시장 내 물량을 왜곡시키며 가격 상승 압력을 키울 수 있다. 정부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며 “과도한 물량 확보는 오히려 공급 불안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원료 가격 변동성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 지속될 경우 의료소모품 수급 불안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일시적 수급 문제로 보기보다 구조적 리스크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보건산업 전문가는 “에너지, 화학, 의료가 연결된 공급망 구조에서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전체 시스템이 영향을 받는다”며 “이번 사태는 국내 의료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난 사례”라고 평가했다.
결국 핵심은 단속이 아니라 구조 개선이라는 지적이다.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집중관리와 규제 완화, 시장 교란 행위 단속이 필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원료 공급선 다변화, 전략 비축, 유통 정보 투명화 등 근본적인 공급망 재설계가 요구된다.
이번 주사기·수액세트 사태는 단순한 의료소모품 부족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지정학 리스크가 어떻게 의료현장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정부의 단속이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구조적 한계를 드러낼지는 앞으로의 대응에 달려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 코로나 당시 마스크 사태에서도 나타났듯, 탁상행정으로 문제를 접근하면 결국 환자에게 큰 피해가 돌아간다"며 "시장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 맥을 짚어 대응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