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불확실 약 급여화·수조원 재정 부담 가능성”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신약 약가제도 개편안의 핵심인 신속등재 방안이 사실상 희귀질환 치료제를 중심으로 한 ‘네거티브 리스트’ 전환이자, 20년 가까이 유지돼 온 선별목록제(포지티브 리스트)를 무력화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효과성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급여 문턱을 낮추면 효과가 불분명한 신약의 급여 등재가 확대되고, 건강보험 재정 부담도 수조원대로 커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는 18일 온라인으로 약가제도 설명회(신약) 1차 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신약 약가제도 개편 방향을 비판하며 대안 마련을 촉구했다. 이날 발표와 질의응답은 이동근 건약 부대표가 진행했다.
"제약사 원하는 자율가격 허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이 부대표는 정부가 추진하는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에 대해 “기존에는 허가 뒤 급여 등재 절차에서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효과성을 평가했는데, 이번 제도는 급여 기준만 설정할 뿐 사실상 임상적 유용성 평가나 비용효과성 평가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건약 입장에서는 이는 20년 동안 유지해 온 포지티브 리스트를 버리고,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네거티브 리스트로 전환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주요 8개국 가격을 기준으로 신속등재 약가를 산정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건약은 미국, 영국, 스위스,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등 8개국 평균가격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 실질적으로는 제약사가 원하는 수준의 자율가격을 허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건약은 해외 비공개 약가를 참조하는 구조 자체가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를 확대하는 것은 약가 적정성보다 고가 약제 진입을 쉽게 만드는 방향이라고 비판했다.
건약은 특히 정부가 사후 경제성 평가를 통해 보완하겠다고 설명하는 점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 부대표는 “사후 평가를 하는 나라들도 기본적으로는 임상시험 자료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실사용자료는 보완적으로 활용한다”며 “실사용자료는 충분히 축적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은 신속등재된 약제가 사실상 검증 없이 급여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속등재, 브레이크 없이 시행부터?…재정 부담만 키울 것"
더 큰 문제는 제도 시행 시기와 통제장치 마련 시점이 엇갈려 있다는 점이라고 건약은 지적했다. 정부는 2026년부터 신속등재를 시작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사후 경제성 평가의 구체적 방식은 2026년 연구용역을 거쳐 2027년에 확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건약은 이를 두고 “핵심 통제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를 먼저 시행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부대표는 현재 국내 허가 의약품이 약 5만7000개인데 비해 급여 등재된 약은 약 2만1000개 수준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머지 상당수는 제약회사가 등재 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신청했지만 탈락한 약들”이라며 “희귀질환 치료제가 허가만으로 사실상 급여 진입이 가능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지금까지 비급여 상태였던 약들도 급여 신청에 대거 나설 수 있어 이를 걸러낼 평가 절차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재정 부담도 주요 쟁점으로 꼽혔다. 건약은 2018년부터 2024년까지 허가된 희귀질환 치료제를 분석한 결과, 아직 급여 등재되지 않은 품목이 70개가 넘는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53개 품목을 조사한 결과 해외 거래가격과 국내 비급여 사용가격 등을 반영한 평균 가격이 약 2억7000만원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건약은 미등재 희귀질환 치료제들이 신속등재 방식으로 대거 급여 신청에 나설 경우 건강보험 재정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정부가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건약은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신약 선등재 후평가 방안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2028년부터 혁신신약에도 유사한 구조를 적용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건약은 혁신신약을 선별하려면 결국 기존 약 대비 치료효과 개선 여부를 판단해야 하고, 이는 다시 임상적 유용성 평가를 필요로 한다고 봤다. 즉 한편으로는 임상적 유용성 평가를 생략한 채 선등재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혁신신약 여부를 가리기 위해 임상적 유용성을 근거로 삼겠다는 점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비용효과성 평가 기준인 ICER 임계값 인상을 추진하는 데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건약은 ICER 임계값 상향은 결과적으로 신약의 허용 가격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큰데, 정작 환자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제약사의 출시 전략은 시장 규모와 기대 수익, 과거 출시 관행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ICER 임계값 상향만으로 국내 출시가 빨라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대표는 영국 사례를 거론하며 “영국이 ICER 임계값을 조정한 것은 환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제약사와의 협상 구조 속에서 움직인 측면이 있었다”며 “한국 정부가 이를 환자 접근성 개선 수단으로 설명하려면 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중가격제 확대, 약가 불투명성 키워...환자 접근성 개선과는 무관"
이중가격제 확대에 대해서도 건약은 약가 불투명성을 키운다고 비판했다. 현재 위험분담제의 환급형 계약에서도 표시가격과 실질 거래가격 간 차이가 존재하지만, 개편안은 이를 더 넓은 범위로 확대하려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건약은 기존 약과 효과가 유사한 신약, 제네릭이 있는 오리지널 의약품, 환급형 위험분담 계약 종료 약제, 개량신약, 바이오시밀러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은 환자 접근성 개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약제까지 불투명한 가격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적응증별 약가제에 대해서도 건약은 건강보험 재정 부담 확대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나의 약제가 여러 암종이나 여러 적응증을 보유할 경우 적응증별로 다른 가격을 설정하면, 효과가 상대적으로 좋은 적응증에는 높은 가격을, 그렇지 않은 적응증에는 낮은 가격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가격 구조가 세분화될 수 있다. 건약은 이런 구조가 제약사 입장에서는 수익 극대화에 유리하지만, 건강보험 입장에서는 총약제비 증가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또 지금까지는 급여 범위가 확대될 때 약가를 일정 부분 인하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통제해 왔지만, 적응증별 약가제가 도입되면 급여 범위가 늘어나도 최초에 정해진 가격 구조가 유지돼 사후 인하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건약은 2024년 일부 항암제의 급여 범위 확대 과정에서 약가 인하가 이뤄지며 약 500억원의 재정 절감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면서, 적응증별 약가제가 도입되면 이런 절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건약은 대안으로 외국 참조가격 기반 약가제도의 축소와 경제성 평가 강화를 제시했다. 해외 약가 비밀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외국 가격을 참조하는 방식은 실효성이 떨어지는 만큼, 경제성 평가를 수행할 인력을 확충하고 평가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허가 단계부터 임상적 유용성을 조기에 평가하는 호라이즌 스캐닝을 도입해 경제성 평가 기간을 줄이는 방안도 제안했다.
"외국 참조가격 기반 약가제도 축소 또는 폐지...부실특허 검증"
이와 함께 신약의 독점권 남용을 막기 위한 특허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건약은 허가특허연계 제도의 축소, 자료독점권 규정 개정, 부실특허에 대한 사전 이의신청제도 도입 등을 통해 경직적인 독점 구조를 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한국 시장 규모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캐나다, 호주, 아시아 주변국 등과 공동 경제성 평가나 공동 약가 협상을 추진하는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등재 후 사후관리 강화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건약은 급여 등재 이후 추가 임상연구를 포함한 주기적 사후평가를 실시하고, 다른 국가의 약가와 특허·독점 구조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캐나다의 특허의약품가격검토위원회(PMPRB)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별도 기구를 국내에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건약은 이번 개편안을 종합적으로 볼 때, 효과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약을 먼저 급여화하고 사후 검증은 뒤로 미루는 구조, 약가를 높이는 방향의 ICER 조정, 불투명성을 키우는 이중가격제 확대, 재정 통제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적응증별 약가제 도입이 한꺼번에 추진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부대표는 “지금 필요한 것은 제약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의 약가정책이 아니라, 불분명한 효과를 가진 약은 더 엄격히 검증하고 독점 구조를 견제하며 급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라며 “참조가격제 의존을 줄이고 경제성 평가와 사후관리, 국제 공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약가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건약은 오는 25일 온라인 2차 간담회에서는 제네릭 약가제도와 사후관리 제도 개편방안에 대해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