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단체 "탈모보다 생명이 먼저"…중증·희소질환 건보 보장성 확대 촉구
KT증후군·소세포폐암 환자 가족들, 치료비 부담 호소…"암 보장률 하락부터 해결해야" "탈모 급여화 반대 아니다…정부, 중증질환 보장성 확대 청사진 제시해야"
정부가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급여화를 위한 사회적 숙의에 착수한 가운데 환자단체가 암과 희소질환 환자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먼저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탈모 치료제 급여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과 직결된 중증질환 환자들이 여전히 막대한 치료비 부담 속에 놓여 있는 만큼 건강보험 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9일 청와대 사랑채 분수대 앞에서 '탈모 치료제 급여화 사회적 숙의 과정 추진에 대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희소질환 환아 보호자와 소세포폐암 환자 가족이 참석해 치료 과정에서 겪고 있는 경제적 부담과 제도적 한계를 직접 호소했다.
"희소질환자는 건보 사각지대…삶의 질도 생존도 위협받아"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한국PROS환자단체 서이슬 대표는 희소질환인 KT증후군(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 환아를 키우는 보호자다.
서 대표는 "KT증후군은 국내 환자가 500명 남짓인 희소질환으로 완치법이 없고 일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만 이뤄지고 있다"며 "정맥과 모세혈관, 림프계 이상으로 몸 곳곳에 모반과 정맥류가 생기고 팔다리가 비대해지는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적 차별과 삶의 질 저하가 건강보험 보장성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왜 선천성 희소질환 환자들은 여전히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KT증후군 환자의 대표 증상인 화염상 모반 치료를 위한 레이저 시술이 평생 6회까지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점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서 대표는 "KT증후군 환자들은 평균적으로 수십 차례 레이저 치료를 받는데도 건강보험은 평생 6회만 인정한다"며 "그마저도 얼굴처럼 눈에 보이는 부위에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경우에 한해 급여를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천성 희소질환자의 모반은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6회까지만 급여를 적용하면서 청년 탈모는 위축감을 이유로 급여화를 논의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정맥류 치료도 대부분 비급여라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그는 "KT증후군 환자는 평생 반복적으로 하지정맥류 시술을 받아야 하지만 대부분 비급여"라며 "산정특례 대상이라도 비급여 시술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척추측만증과 다리 길이 차이, 발 변형, 림프액 축적에 따른 출혈 등으로 아이는 매일 척추보조기와 압박스타킹, 특수 맞춤신발을 착용해야 한다"며 "척추보조기는 135만원, 압박스타킹은 12만원, 특수 맞춤신발은 50만원인데 모두 보호자가 부담하고 있다"고 했다.
또 "잦은 병원 방문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고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일을 하는 부모들도 있다"며 "어린 환자들이 부모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먼저 치료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현실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PROS환자단체가 회원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공개했다. 응답자의 86.8%는 건강보험 적용 한계로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누적 본인부담금이 1000만원을 넘는다는 응답은 40.8%, 3000만원 이상이라는 응답은 19.7%였다. 응답자 3명 중 1명은 비용 때문에 필요한 치료를 포기하거나 미룬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서 대표는 "정부는 희소질환자의 의학적 필요와 삶의 질을 중심으로 급여 기준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며 "산정특례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시술과 약제는 물론 보조기와 특수신발 등 치료에 필요한 소모품까지 급여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 달 약값 5000만원…환자에게 반년은 너무 긴 시간"
이어 발언한 허지형 씨는 확장기 소세포폐암 환자인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가족이다. 허 씨는 "아버지는 지난해 4월 지속된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확장기 소세포폐암 진단을 받았다"며 "1차 항암치료에는 반응을 보였지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척수까지 암이 전이됐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2차 치료도 4개월 만에 내성이 생겼고 이후 남은 선택지는 호스피스나 임델트라뿐이었다"고 했다.
허 씨는 "지난 30년 동안 소세포폐암에는 사실상 3차 치료제가 없었는데 임델트라가 마지막 희망으로 등장했다"며 "하지만 한 달 약값이 5000만원에 달해 평범한 가정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지난해 12월부터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비급여여서 연간 치료비가 5억원 이상 필요하다"며 "올해 4월 첫 투약 이후 현재까지 약 1억5000만원을 부담했고 다음 주에도 약값만 2250만원 이상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 효과가 입증된 약이 있음에도 비용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고 있다"며 "국민동의청원이 5만2647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됐지만 실제 급여 적용까지는 여러 심의 절차를 거쳐 최소 반년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세포폐암 환자들에게 반년은 너무 긴 시간"이라며 "정식 급여가 이뤄질 때까지라도 환자들이 치료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한시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의 취지는 탈모 치료제 급여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의 우선순위를 재검토해 달라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암 정책은 세계 각국이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는 보건의료 정책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암과 중증질환 건강보험 보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4대 중증질환 보장률은 2021년 84%에서 2024년 81%로 3%포인트 하락했고, 암 환자 보장률도 같은 기간 80.2%에서 75%로 5.2%포인트 떨어졌다"며 "정부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분석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어 "치료비 때문에 의료빈곤에 빠지는 환자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탈모 치료제 급여화를 주요 의제로 논의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환자단체는 탈모 치료제 급여화를 위한 사회적 숙의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며 "탈모 치료제 역시 건강보험 적용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 대표는 "문제는 탈모보다 보장률이 계속 낮아지고 있는 암 환자와 중증질환 환자를 위한 구체적인 보장성 확대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희귀질환과 소아당뇨, 비만, 탈모 외에 어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정부가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기자회견은 탈모 치료제 급여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의 무게중심을 중증질환과 암 환자로 옮기고, 치료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 환자단체의 요구"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탈모 치료제 급여화를 위한 사회적 숙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은 생명과 직결된 중증질환 치료에 우선 투입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합회는 건강보험은 국민적 관심이나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의학적 필요성과 임상적 유용성, 비용효과성, 환자의 경제적 부담, 건강보험 재정 영향, 미충족 의료수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운영되는 사회보험이라고 밝혔다. 이어 암·희귀질환·심뇌혈관질환 환자들은 여전히 높은 비급여 부담과 신약 접근성 문제를 겪고 있으며, 2021년 이후 4대 중증질환과 암질환 건강보험 보장률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에 탈모 치료제 급여화 논의와 관련한 대상과 기준, 예상 이용자 수 및 재정 소요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의 우선순위를 중증질환 치료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고가 항암제와 생명 직결 치료제의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와 환자 접근성 개선 대책을 마련하고, 청년층 탈모 지원이 필요하다면 건강보험 재정이 아닌 별도 국고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자회견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