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니어 은퇴 의사 '선택의 시간'
안규리 라파엘나눔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
시니어 은퇴 의사란 일반적으로는 65세 이후의 의사를 의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삶을 새롭게 설계하는 의료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은퇴는 나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국내 시니어 은퇴 의사의 규모를 보면 연간 약 1,000~1,500명이 은퇴하며, 2035년에는 약 3만 2천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2024년 기준 시니어 은퇴 의사의 진로는 개원 및 봉직의가 약 5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학병원과 전문병원은 각각 약 15%, 공공의료는 약 5%에 불과하다. 이는 시니어 은퇴 의사가 민간 진료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니어 은퇴 의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다양하지만, 이를 그룹화하면 안정된 삶의 기반, 삶의 여유와 관계 회복, 두 번째 성장과 몰입, 그리고 삶의 의미와 기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은퇴 이후에는 이 네 가지를 조합해서 여러 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은퇴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단계적 전환이기 때문이다. 은퇴는 삶의 의미를 여러 번 재설계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3단계 전략을 적용하면 65세까지는 준비 단계, 65~70세는 역할 전환 단계, 70세 이후는 보람 중심 활동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시니어 은퇴 의사의 진로는 크게 진료 의사, 비진료 의사, 그리고 의료 나눔에 참여하는 의사로 구분할 수 있다. 비진료 영역은 다시 자기 돌봄과 비임상 의료 전문가 역할로 나뉜다. 은퇴 후 의학을 완전히 떠나 새로운 관심에 몰입하거나 비임상 의료 전문가로서 병원 경영, 정책 자문, 공공기관, 교육·컨설팅·국제협력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의 장점은 풍부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정책과 현장 간 간극을 줄일 수 있으며 지속적인 성장과 몰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반면 신기술과 디지털 시스템 적응 부담, 연령 편중에 따른 지속성의 한계가 존재한다.
은퇴 후 신약 개발, 헬스케어 산업, 창업, 바이오·제약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임상 기반 의사결정과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협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산업 환경에 대한 이해 부족, 빠른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적응 부담, 규제와 윤리 리스크가 한계로 작용한다.
의료 나눔은 또 다른 시니어 은퇴 의사들의 선택 영역이다. 의료 나눔은 축적된 임상 경험을 사회에 환원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와 보람을 제공한다. 인식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의사는 풍부한 경험과 소통 능력으로 호감도가 높다.
그러나 최신 지식과의 간극, 개인 헌신에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성의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1 라파엘 나눔은 1997년 라파엘 클리닉을 시작으로 국내외 의료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의료 나눔 활동을 하고 있으며 시니어 의료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2023년 대한의사협회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의사의 약 84.7%가 재취업 의향을 보였다. 희망 분야는 일반 진료가 가장 많고, 공공의료기관 근무를 희망하는 비율도 83.2%에 달한다. 근무 형태는 주 3일 근무가 가장 선호된다.
은퇴 후 진료 형태는 파트타임과 풀타임으로 나눌 수 있다. 파트타임 진료는 외래, 자문, 검진센터, 대진 등 다양한 형태로 선택할 수 있으며, 여러 기관에서 근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근무 강도를 조절하면서 전문성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계약 구조와 책임, 소득의 불안정성은 고려해야 한다.
풀타임 진료는 업무 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뉜다. 비교적 부담이 낮은 형태로는 요양병원, 검진센터, 중소병원 등이 있으며, 전문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반면 고강도 진료는 전문성과 보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번아웃과 건강 악화의 위험이 크다.
공공의료기관 업무 중간 수준의 업무 강도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니어 은퇴 의사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특히 의료 취약지와 지역사회에서는 경험 있는 의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시니어 은퇴 의사의 공공의료 참여는 경영 부담 없이 소신 진료를 실천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다. 이는 안정된 삶의 기반과 함께 여유, 관계 회복,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다만 최신 지식 부족에 따른 환자 안전 문제와 장시간 근무로 인한 건강 악화, 번아웃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역량 업데이트와 상황을 고려한 근무 설계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최근 은퇴 후 공공의료기관에 근무할 의향이 있는 시니어 의료인의 숫자가 확연히 증가하고 있다. 실제 시니어 의료인이 지역 공공의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해외에서는 재교육과 복귀 프로그램, 유연한 근무 형태, 역할 재설계 프로그램 지원 등을 통해 자연스러운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4년부터 시니어 의사 지원센터를 통해서 필수의료 공백을 메우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시니어 은퇴 의사의 공공의료 참여 시 고려해야 할 첫 번째 요소는 근무 지역이다. 서울은 인프라가 우수하지만 경쟁이 치열하고, 지방은 자율성과 역할이 크지만 인프라 한계가 있다. 결국 서울은 안정 중심, 지방은 의미 중심의 선택이다. 두 번째는 근무 기관 유형이다. 지방의료원은 필수의료 기여가 가능하지만 당직 부담이 있고, 보건소는 안정적이지만 행정 비중이 높다..
세 번째는 업무 강도와 진료 범위다. 이는 취업 형태와 직결되며, 정규직, 계약직, 파트타임, 자원봉사 등 각 형태에 따라 장단점이 존재한다.
은퇴는 준비 없이 맞이하기보다는 최소 5년 전부터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람 있고 행복한 은퇴를 위해서는 안정된 재정, 건강, 삶의 목적과 정체성, 그리고 의료 네트워크와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
이는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으며, 점진적 전환이 필요하다. 삶의 목표 설정을 했다면 우선 자신의 건강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근무 강도를 설정해야 하며, 경제적 계획과 면허 및 교육 요건을 점검해야 한다. 최소 3개월 이상의 역량 업데이트 기간도 필요하다. 둘째, 재취업 시에는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근무조건, 업무 범위, 당직, 보수체계, 책임 및 분쟁, 보험 및 면허 등이다. 셋째는 단계적 온보딩 과정을 통해 적응 기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즉 현장투입 및 안착을 위한 초기 적응 기간을 4-8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직은 공식 채용 공고와 의협, 메디게이트 같은 인터넷 플랫폼과 닥터링크, 닥터커리어 같은 직접 연결을 지원하는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실제로는 지인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파엘 나눔은 시니어 의료인의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지원하기 위해 시니어 아카데미를 운영해 왔으며, 지금까지 총 286시간의 임상, 공공, 교양 분야의 온라인 강좌를 제공해 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환자의 삶을 바꾸는 일을 해왔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순간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준비된 사람에게 더 좋은 기회로 돌아온다.
(본 내용은 2026년 4월 14일 라파엘 시니어아카데미 강좌에서 발표된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