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5만명 벽 넘고도 ‘공회전’…국민동의청원, 환자 호소 외면하나”

항암제·희귀질환 치료제 급여 요구 잇따르지만 성원도 쉽지 않아 어렵게 성원해도 상임위 ‘논의 0건’…임기 만료 폐기 반복 본회의 채택돼도 권고 수준…“실질적 기속력 확보 필요”

2026-04-13     최은택 기자

[보이스 진단=유명무실한 국회 국민동의청원]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 급여 확대를 요구하는 환자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잇따르고 있지만, 제도는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원 성원 자체가 어려운 데다, 어렵게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국회 심사 단계에서 멈춰 서는 구조적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국회에 따르면 국민동의청원은 국민이 직접 입법이나 정책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공식 통로로 청원 게시 후 30일 내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심사를 받는다. 이후 청원심사소위원회와 상임위 전체회의를 거쳐 본회의에 부의될 수 있다.

국회법상 상임위는 청원이 회부되면 원칙적으로 90일 이내 심사를 마쳐야 하며, 한 차례에 한해 최대 60일 연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임위 의결을 통해 심사기간을 반복적으로 연장할 수 있어 사실상 처리기한이 없는 구조인데, 이마저 절차가 실제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진=챗GPT]

암제·희귀질환 치료제 청원 줄이어…“성원부터 높은 장벽”

뉴스더보이스가 국회 청원 게시판을 정리한 결과, 올해도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항암신약 등의 급여 등재와 급여 확대를 요구하는 환자들의 절박한 청원이 10건 넘게 올라왔다.

희귀·난치성 혈액암 치료제의 급여 심사 절차 개선과 신속 급여화를 요구하는 청원을 비롯해,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치료제 ‘폴라이비’의 건강보험 등재 촉구, 전이성 전립선암 치료제 ‘린파자’ 급여 확대 요구 등이 대표적이다.

또 영유아 대상 RSV 예방접종의 건강보험 적용, 혈소판증가증 치료제 ‘베스레미’ 급여화 요구, 폐암 치료제 ‘알레센자’ 급여 확대,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급여 기준 개정 등 다양한 질환군에서 청원이 이어졌다.

임상시험 중인 약물의 치료목적 사용 승인 요청이나 ‘옥시베오’ 허가 및 급여화 요구, ‘키트루다·파드셉 병용요법’ 급여 확대 청원도 게시됐다. 현재는 파킨슨병 치료제 ‘바이알레브’의 국내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이 동의 절차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상당수 청원은 5만명 동의 요건을 채우지 못한 채 게시 기간 종료와 함께 사라진다. 실제 올해 약제 청원은 단 한건도 성원되지 못했다. 환자 수가 제한적인 희귀질환의 경우 특성상 성원 기준 자체가 과도한 측면도 있다.

환자단체 한 관계자는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이 모두 참여해도 5만명을 채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절박한 상황에서도 제도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성원 이후엔 시스템 사실상 '무작동’…청원소위 한 번도 논의 안해

더 큰 문제는 성원 이후다. 현재 5만명 이상 동의를 얻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된 약제 관련 청원들은 청원심사소위원회에 계류돼 있지만,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못한 상태다.

유방암 뇌전이 치료제 ‘투키사’ 급여 적용 요청, RET 변이 폐암 치료제 ‘레테브모’의 신속 급여화 촉구, HER2 저발현 환자 대상 ‘엔허투’ 급여 확대 청원 등 주요 항암제 관련 청원이 줄줄이 포함돼 있다. 리브리반트 급여화, 조기 유방암 치료제 ‘버제니오’ 급여, 희귀질환 치료제 ‘웰리렉’ 급여 적용 요청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청원은 2024년부터 2025년 사이 청원심사소위에 회부됐지만, 뉴스더보이스 확인결과 심사는 단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청원심사소위는 백종헌 위원장을 포함해 남인순·이수진 의원 등 3명으로 구성돼 있으나,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청원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기 일쑤다. 실제로 트로델비, 베스레미, 루타테라, 타그리소, 엔허투, 크리스비타 등 주요 치료제 관련 청원이 지난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심사 없이 사라졌다.

국회 한 관계자는 “청원소위가 별도로 자주 열리지 않는 구조인데다가 소위위원들도 관심이 별로 없어서 계류 상태가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다”며 “제도상 심사 기한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청원심사소위원회에 회부돼 잠자고 있는 웰리렉 급여등재 요청 청원. 이 청원은 2024년 7월 17일 청원소위에 회부됐지만 1년 9개월이 넘도록 단 한 차례도 심사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웰리렉은 지난해 12월 세번째 도전에도 암질환심의위원회를 넘지 못하고 아직도 비급여 상태다. 국내 시판 허가를 받은 지 3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급여권 진입은 오리무중이다. [사진=국회]

본회의 가도 ‘권고’뿐…“실효성 확보 장치 필요”

설령 청원이 상임위와 본회의를 거쳐 채택되더라도,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 수준에 그친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국회가 정부에 정책 개선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이를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는 없어서 실제 급여 정책이나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청원이 통과되더라도 (간접 압박 외에는)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며 “결국 환자들은 다시 개별 협상이나 제도 절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청원에 관심가 기대가 많은 환자단체 등은 성원 기준 완화나 사안(질환) 특성별 차등 적용, 청원소위 자동 상정과 심사 기한 설정, 정부의 공식 답변 의무화, 공청회 연계 등을 포함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본회의 채택 청원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기속력을 부여하거나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환자단체 한 관계자는 “국민동의청원은 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제도적 창구”라며 “지금처럼 형식적으로 운영된다면 환자들의 절박함은 해소될 수 없다”고 말했다.

단순히 목소리만 담아 내고 그치는 유명무실한 제도를 넘어서 환자와 국민의 요구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실질적 통로로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