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기본법 국회 통과…‘치료 대상’에서 ‘권리 주체’로 전환 신호탄

국가 환자정책 책임·단체 참여 제도화…“하위법령 정비가 성패 가를 것”

2026-03-31     최은택 기자

국회가 31일 본회의에서 환자기본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국내 보건의료 체계가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환자단체들은 “환자가 단순한 치료 대상이 아니라 보건의료의 주체로 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처음으로 마련됐다”며 환영했다.

이번 입법은 공급자 중심으로 운영돼 온 의료체계를 환자 권리 중심으로 재편하는 출발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환자의 치료 경험과 요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법률 차원에서 마련되면서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기본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와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날 본회의를 통과했다. 기존 환자안전법 개정안과 병합 심사를 통해 위원회 대안 형태로 마련됐다.

환자단체들은 2025년 7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100일 동안 「환자기본법안」의 신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진행했었다. 이후 2026년 1월 6일 남인순 의원이 「환자안전법」 내용을 2024년 발의했던 「환자기본법안」 내용과 통합한 「환자기본법안」을 새로 대표 발의하면서 3개월 만인 31일 국회를 최종 통과했다. 사진은 1인 시위 첫 주자로 나선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 [사진=한국환자단체연합회]

국가 책임 아래 환자정책 체계화

법안에는 환자와 환자단체의 정의를 비롯해 환자의 권리와 의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실태조사와 연구사업, 환자정책 기본계획 및 시행계획 수립, 환자정책위원회 설치 등이 담겼다.

그동안 환자정책은 개별 사안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법 제정을 통해 국가가 중장기 계획 아래 환자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이행해야 하는 틀이 처음으로 마련됐다.

보건의료 정책의 중심이 의료기관이나 공급자에서 환자의 권리와 삶의 질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환자단체 법적 지위 명문화…정책 참여 확대

이번 법안의 또 다른 핵심은 환자단체의 법적 근거가 처음으로 명시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환자단체는 별도의 법적 지위가 없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제한적으로 참여해 왔다.

앞으로는 환자단체가 독립된 정책 주체로서 정책 형성 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환자의 실제 경험과 요구가 정책에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제도적으로 확보된 셈이다.

또 환자기본법은 기존 환자안전법을 통합해 환자 권리 보장과 환자안전 정책을 하나의 기본법 체계로 정리했다. 환자가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를 포함한 주요 권리가 보다 명확히 규정됐고, 환자와 보호자의 참여 기반도 확대됐다.

환자안전사고 조사·재발방지 체계 강화

환자안전사고 대응 체계도 강화됐다. 중앙환자안전센터가 필요할 경우 직접 조사에 나서고, 조사 결과에 따라 의료기관에 개선 조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조사 과정에서 확보된 자료와 진술은 재판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되지 않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해 의료기관의 협조를 유도했다. 환자안전사고를 책임 공방이 아닌 재발 방지와 학습의 영역으로 전환하려는 취지다.

개선 활동을 충실히 이행한 의료기관에는 행정적·재정적 지원과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 제도의 실효성도 높였다.

5월 29일 ‘환자의 날’ 지정

법안에는 매년 5월 29일을 ‘환자의 날’로 지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계기로 환자정책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과 홍보를 추진할 수 있다.

이날은 항암제 투약 오류로 사망한 어린이의 기일로, 환자안전법 제정의 계기가 된 날이다. 환자단체들은 환자안전과 권리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환자단체들은 이번 법 제정이 의료공백 사태를 겪으며 환자들이 직접 제기한 문제의식과 입법 촉구 활동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국회 앞 릴레이 시위 등 지속적인 활동이 입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법 통과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하위법령 정비와 제도 설계가 뒤따르지 않으면 법이 선언적 수준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의료공백 속 환자운동 결실…이제는 실행 단계”

환자단체들은 “환자정책위원회 구성, 실태조사, 환자단체 참여 보장 등 후속 조치를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며 “그래야만 환자기본법이 실제 환자의 권리와 삶을 바꾸는 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환자기본법 제정을 주도한 남인순 의원은 “이번 법 통과는 보건의료정책 패러다임을 공급자 중심에서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자가 보건의료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거듭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남 의원은 환자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기본법이 부재했던 점을 지적하며 감염병 대유행이나 의료공백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환자가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권리를 법률로 명확히 규정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법안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5년 단위 환자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연도별 시행계획을 추진하도록 하는 한편, 실태조사와 정책 영향평가, 연구사업 수행 등을 통해 환자정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한 환자정책위원회를 설치해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환자단체 보호·육성과 정책 참여 기회 보장도 명문화했다.

특히 환자의 권리로는 적정한 보건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충분한 설명을 듣고 결정할 권리, 의료정보 접근권, 개인정보 보호권,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 등 총 12가지 권리가 규정됐으며, 환자의 의무도 함께 명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