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여전히 진료의 객체…투병·권리 보호 위한 법적 기반 필요”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 국회 공청회 진술

2026-03-11     최은택 기자

환자 권리 보장과 환자 중심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위해 ‘환자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환자단체의 주장이 국회에서 제기됐다. 환자의 권리와 투병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법률과 정책 체계가 부재해 환자들이 보건의료 체계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10일 오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장에서 열린 환자기본법안 공청회에서 진술을 통해 “우리나라 보건의료 환경은 여전히 환자 중심적이지 않으며 환자의 투병과 권리 증진을 위한 법률과 정책 기반이 부족하다”며 환자기본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10일 열린 환자기본법 국회 공청회에서 안기종 대표가 서미화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국회의사중계시스템]

“의정갈등 의료공백…환자들이 가장 큰 피해”

안 대표는 우리나라 보건의료 환경이 환자 중심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최근 의정 갈등에 따른 의료공백 사태를 들었다. 의대 정원 문제로 촉발된 전공의 집단사직 이후 약 1년 7개월 동안 의료공백이 이어지면서 환자들이 심각한 피해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간 이어진 의료공백 속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한 중증·희귀난치질환 환자들의 투병 의지가 꺾였고 응급실과 중환자실, 분만실 등 필수 진료과에서도 의료공백이 발생했다”며 “환자들은 치료 정보를 서로 공유하며 각자도생 방식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환자들이 우리나라 보건의료 환경의 구조적 문제를 절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정 갈등과 의료공백을 겪으면서 환자의 투병과 권리 증진을 위한 법률 체계와 통합 지원 기관이 없다는 현실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신약 접근성을 지적했다. 그는 “생명과 직결된 신약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아 시판되더라도 비급여 상태에서는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건강보험 등재만 기다리다 치료 기회를 놓치거나 사망하는 환자들이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환자 권리 규정 여러 법에 흩어져”

안 대표는 현재 우리나라에는 보건의료 관련 개별 법률이 다수 존재하지만 환자의 투병과 권리를 중심으로 규정한 단독 법률은 없다고 지적했다.

의료법, 보건의료기본법, 응급의료법, 약사법, 간호법, 의료기사법, 장기이식법, 혈액관리법, 국민건강보험법, 감염병예방법, 암관리법, 희귀질환관리법, 첨단재생바이오법, 공공보건의료법, 의료기기법, 제약산업법 등 여러 법률에 환자 관련 규정이 일부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 환자를 진료의 객체나 보건의료행위의 수혜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 법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환자의 권리는 보건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 알 권리와 자기결정권, 비밀 보호 권리, 상담 및 조정 신청 권리,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 등 제한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다고 안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 질의권, 건강정보 접근권, 건강정보 보호권, 교육받을 권리, 정책에 대한 의견 제안권, 환자단체 자조권 등은 아직 법적 근거가 없는 권리”라며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환자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 차원의 환자 정책 체계도 부재”

안 대표는 환자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하는 체계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정부는 장애인, 여성, 노인, 청년, 청소년, 소비자 등을 대상으로 종합 정책 계획을 수립·추진하고 있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종합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환자의 투병과 권리 증진을 위한 실태조사나 정책 연구가 정부 차원에서 수행된 적이 없고 이를 총괄할 법정위원회도 없다”며 “환자정책 종합계획과 시행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할 환자정책위원회와 같은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자단체 법적 지위 없어 정책 참여 제한”

환자단체의 정책 참여가 제한적인 현실도 문제로 제기됐다.

안 대표는 “우리나라에는 ‘환자단체’의 정의를 규정한 법률이 없어 환자단체가 정부나 공공기관의 법정위원회에 환자단체 몫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약 60개의 법정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환자단체가 참여하는 위원회는 약 20개 수준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환자단체 몫이 아닌 시민단체 몫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환자기본법에 환자단체 정의 규정을 두면 환자단체의 정책 참여가 확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안에서는 환자단체를 “환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투병 및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정의하고 있으며, 환자정책 결정 과정에서 환자와 환자단체가 토론·건의·정책 제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902개 환자단체 대부분 개인 운영”

환자단체의 현실적인 어려움도 언급됐다.

안 대표에 따르면 국내에는 약 575개 질환과 관련된 902개의 환자단체가 활동하고 있지만 대부분 조직과 재정이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이 가운데 개인이 운영하는 환자단체가 77.7%로 가장 많고 협회나 단체, 병원·의료진이 운영하는 단체는 각각 8.6%, 7.8% 수준에 불과하다. 또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환자단체는 5개, 서울시에 등록된 환자단체는 19개에 그친다.

안 대표는 “대부분의 환자단체가 온라인 커뮤니티 수준에 머물러 있어 환자 권익을 충분히 대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환자단체를 보호·육성하고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자기본법, 환자 권리·환자안전 통합하는 법”

안 대표는 환자기본법이 제정되면 환자 권리와 환자안전 정책을 통합하는 법체계가 마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환자안전법은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 보장에 초점을 맞춰 의료기관 중심의 사고 보고 체계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환자기본법이 제정되면 환자와 보호자가 환자안전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구조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여러 법률에 흩어져 있는 환자 권리 규정과 환자안전 제도를 환자 중심과 환자 참여를 지향하는 단일 법체계로 통합한다는 점에서 환자기본법 제정은 의미가 있다”며 “환자를 보건의료의 객체가 아닌 정책과 제도에 참여하는 주체로 인정하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환자기본법 제정안 2건은 11일 열리는 보건복지위원회 제1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심사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