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설계하는 환자 중심 보건의료환경을 만들어 갑시다"
2026년은 의료공백 교훈 위에 세워야 할 보건의료 개혁의 출발원년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
* 「2026년 새해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는 주제로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이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뉴스더보이스는 안 회장의 소망과 다짐을 지지하는 마음에서 전문을 게재합니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환자와 환자 가족은 의정 갈등과 장기화된 의료 공백 속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붉은 말의 해인 올해에는 환자와 환자 가족이 더 이상 불안과 공포 속에서 버티지 않아도 되는, 투병과 돌봄에만 전념할 수 있는 보건의료 환경이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역시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새해를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암·희귀질환과 같은 중증질환이나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을 찾기는 이제 어렵습니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 환자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입니다. 생명을 연장하고 완치까지 기대할 수 있는 혁신 신약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지만, 비급여 약값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이르는 초고가로 책정되면서 건강보험 등재만을 기다리다 치료 기회를 잃고 생을 마감하는 환자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감염병 대유행과 보건의료인 집단행동으로 인한 의료 공백까지 더해지며 예측 불가능한 보건의료 위기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행 의료 관련 법체계에서 환자는 여전히 보건의료의 ‘주체’가 아니라 진료의 ‘객체’나 수혜 대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환자 중심이 아닌 보건의료 환경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2024년 2월부터 1년 7개월간 이어진 의정 갈등과 의료 공백 사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지난해 9월 전공의 복귀 이후 의료 현장이 일부 정상화되었지만, 2026년 새해를 맞은 지금도 환자와 가족은 의료 공백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10개 소속 환자단체는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국회 앞에서 100일간 릴레이 1인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국회에 계류 중인 ‘의료 공백 재발 방지 및 피해 구제 3법’의 신속한 처리를 촉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끝내 환자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응급실 뺑뺑이’라는 부끄러운 현실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2025년은 지나갔고, 202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정부와 국회는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의료 공백 시기, 중증질환자와 응급 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환자들은 우리나라 보건의료 체계가 환자 중심이 아니라 의사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체감했습니다. 환자의 권리와 투병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역시 분명해졌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환자기본법’ 제정 논의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처럼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는 어떤 상황에서도 멈춰서는 안 됩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이 중요하듯, 환자의 생명권 역시 같은 무게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필수의료가 항상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의사인력 수급 전망 발표 이후 다시 고개를 드는 집단 반대 움직임 속에서 환자들은 또다시 의료 공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필수의료 공백 방지는 2026년 국회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제입니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 역시 이제는 “할 수 없다”는 변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중증 응급환자가 병원을 찾지 못해 구급차 안에서 생명을 잃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국가적 목표부터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그 목표 아래 인력과 시설, 장비, 제도 개선 과제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의료계와 119, 정부와 국회, 국민과 환자가 각자의 책임을 나눠 이행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약가제도 개선방안에는 ‘신속등재-사후평가·조정제도’가 포함돼 있습니다. 혁신 신약에 대해 허가와 동시에 치료 기회를 보장하고, 사후에 합리적으로 조정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이를 2028년 이후 과제로 미루기에는 환자들의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경제적 여력이 없는 환자들이 건강보험 등재를 기다리다 치료 기회를 잃는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제도는 2026년부터 조속히 시행돼야 합니다.
의정 갈등과 의료 공백이라는 긴 터널을 견뎌온 환자와 환자 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환자로서의 아픔과 가족으로서의 간병 경험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연대의 힘이 되었습니다.
2026년은 환자가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닌 설계자가 되는 해가 돼야 합니다. 보건의료 환경을 정부와 의료계, 국회에만 맡겨두지 말고, 환자에게 최선의 제도와 입법이 이뤄지도록 환자가 직접 참여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도 그 중심에서 말 그대로 끝까지 함께 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