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가로막는 건 병이 아니라 제도...정부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강덕원 대표(만성이식편대숙주질환환우회)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단테 『신곡』 지옥편
이 구절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최악의 절망을 상징합니다. GVHD(이식편대숙주질환) 환자들에게 이식 이후의 삶은 마치 이 문구가 새겨진 문 앞에 서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폐가 굳어 숨을 쉴 수 없고, 눈이 멀며, 몸이 굳어져 스스로의 일상조차 불가능해지는 고통 속에서 환자들은 치료제가 있음에도 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저는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으로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은 뒤 중증 GVHD를 앓고 있는 환자이자 환우 모임 대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 기회를 눈앞에 두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최근 만난 한 20대 환우는 중학생 때 발병해 지금까지 집 밖을 자유롭게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산소발생기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고, 부모님은 매달 1천만 원이 넘는 레주록정 약값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비싼 약을 부모님이 감당하고 계셔서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픈 자식이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현실, 이것이 바로 제도가 환자의 희망을 빼앗는 모습입니다.
다른 환자의 사례도 있습니다. 이식 후 눈에 GVHD가 발생해 시력을 잃은 경우입니다. 빛을 보지 못하는 불편함을 넘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혼자 외출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또 어떤 환자는 근육이 굳어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어 평생 병상에 누워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치료제는 있는데, 제도가 길을 막고 있다.”
레주록정은 이미 영국과 일본에서는 보험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희귀질환 환자의 접근성을 위해, 영국은 NHS를 통해 환자들의 치료 기회를 넓히기 위해 신속히 급여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2022년 희귀의약품 지정, 2024년 허가 이후에도 여전히 급여 적용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환자들은 치료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결국 사망하거나 폐이식을 받으며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정부는 늘 재정 부담을 이유로 급여화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GVHD 환자 수는 많지 않아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합니다. 오히려 치료 기회를 놓쳐 폐이식, 장기요양, 간병으로 이어질 경우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훨씬 더 큽니다. 환자 한 명의 폐이식 비용과 장기 요양비는 매달 약값을 감당하는 것보다 훨씬 크며, 가족 전체가 삶의 기반을 잃는 사회적 손실로 이어집니다.
사실 해법은 이미 제도 안에 존재합니다. ‘위험분담제(RSA)’를 적용하면 제약사가 일부 위험을 분담하면서 정부도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환자는 신속히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항암제가 RSA를 통해 등재되었습니다. 레주록정 역시 RSA를 적용하면 환자와 정부 모두 불확실성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희귀·중증 환자들을 위해 몇 가지 특별 장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환자 수가 적어 비용효과성 자료가 부족해도 해외에서 이미 쓰이고 있는 약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신속히 보험 적용을 검토할 수 있는 제도(경제성평가 면제)가 있습니다. 또 일반 기준으로는 “너무 비싸다”며 탈락할 수 있는 약도,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 환자라면 더 유연한 기준을 적용해 보험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장치(ICER 탄력 적용)도 있습니다. 결국 레주록정 같은 약제는 이런 제도를 실제로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 하나 시급한 과제는 산정특례 제도입니다. 현행 암 산정특례는 5년까지만 적용되지만, GVHD는 평생 치료가 이어질 수 있는 질환입니다. 지원이 종료되면 환자들은 곧바로 치료비의 사각지대로 내몰립니다. 따라서 중증 환자에 대해서는 산정특례 연장 기준을 마련하거나, 희귀질환으로 별도 지정해 적용해야 합니다.
이번 정부의 국정과제에는 ‘국민 의료비 부담 완화’와 ‘난치·희귀질환 지원 확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자들의 요구는 정부가 이미 약속한 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논의가 아니라 실행입니다.
치료제가 있는데도 돈이 없어 쓰지 못하는 현실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레주록정의 신속 급여화와 산정특례 개선은 환자의 생명을 지키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이미 영국과 일본은 환자에게 길을 열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이유가 없습니다.
환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치료 기회를 잃고 있습니다. 정부가 더 이상 절차와 수치 뒤에 머물지 말고, 환자의 삶을 지키는 제도로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정부의 책무이자,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