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는 인생의 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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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는 인생의 밑천
  • 문윤희 기자
  • 승인 2021.09.24 0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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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난 꿈이 없어요.”

드라마 ‘응답하라 1998’에서 주인공 덕선이 꿈을 묻는 아빠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이 대사가 가장 아픈 말로 다가 왔는데, 나 역시 그 시절 ‘꿈’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나의 청소년기는 공부보다는 친구가 우선이었고, 대학보다는 세상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했다. 당연히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성적은 나빴고, 친구들과의 우정은 두말하면 서운할 정도로 깊었다. 그러다 현실을 직시한 건 고3을 앞둔 고2 겨울방학에 만난 ‘엄마 친구 딸’의 현실 조언 덕분이었다.

이대 의대를 다니던 엄마 친구 딸은 ‘수포자’였던 나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자청해서 과외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수학은 ‘수학의 정석’도 정석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애초에 과외를 할 생각이 없던 나에게 고역이었다.

내 수준을 엄마의 친한 친구 딸에게 보이는 것도 싫었거니와 친하지도 않은 ‘아는 언니’에게 “언니, 언니”하며 아쉬운 소리를 해댈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과외 첫 시간이 되자 언니는 중학교 수준의 문제를 내고는 내가 푸는 걸 지켜본 뒤 작게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학을 포기하면 대학은 못 가. 넌 아예 대학 갈 생각이 없었구나.”

정말이지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말이었지만 언니는 차분했고, 심지어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대꾸를 한답시고 한 말이 “그게 아닌데…….그렇게 됐어”였다.

과외를 하는 내내 수학문제를 설명하는데 집중했던 언니는 어느 날인가 나에게 “넌 꿈이 뭐야”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대답이 바로 “난 꿈이 없어”였다. 언니는 그 말을 듣고는 “한 번도 뭘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네”라며 역시나 평온한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그 뒤의 일들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니는 내게 수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을 정도의 과외를 해준 뒤 인턴생활이 시작돼 더 이상 시간 내기가 어렵다며 과외를 끝냈다.

떠밀려 대학에 가기 싫다던 내 허영심에 “넌 실력이 없어 못 간다”는 요즘 말로 현타를 준 언니의 조언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학’이라는 목표를 설정했던 것 같다.

계속 넘어지던 인생, 그런데로 움직였던 이유 

IMF세대로 불리는 1990년대 중후반 학번에게 대학은 마치 ‘실업자 양성소’ 같은 곳이었는데 나도 이 중 일부였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는 상황을 면하기 위해 나는 교수님이 소개한 직장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곳이 ‘신문사’였다. 당시에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일단 다니고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경기 회복은 요원했고, 배운 도둑질이 ‘기사 쓰는 일’이라 간판만 바꾸며 직업을 유지해야만 했다.

한번은 적절한 기회가 와서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제작·지원하는 정부 산하 재단 홍보팀에 입사했지만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치솟자 이 영역을 IT산업의 일부로 봐야한다는 부처와 문화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부처 간 경쟁 속에 회사가 공중 분해돼 직업을 잃는 신세가 됐다.

겨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다 싶었는데 1년 정도만 경험하게 해보고는 자리를 앗아갔다. 그렇게 돌아온 직업 ‘기자’는 지금은 ‘제 몸에 맞는 옷처럼’ 평생의 일이 됐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은 직업이기도 했다.

계속 꿈을 꾸는 이유

30대 초반까지 여러 직장을 떠돌 듯 다니던 내게 작은 소망이 생겼다. “제발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있었으면,” 이런 염원은 자연스럽게 주변 지인들의 직장 소개로 이어졌고 나는 그 염원을 한 직장에서 14년 이상 다니는 결실로 맛보기도 했다.

한 직장에 자리를 잡고 다니게 되면 안정된 느낌을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데 이런 여유는 ‘이성과의 만남’을 소화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한다. 20대 이후로 연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혼자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줄 곧 했었는데 30대 들어서 만난 지금의 남편과는 어느 순간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진짜 결혼을 하게 됐다.

‘꿈’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니 성인이 돼서 지금까지 내가 줄 곧 바라던 것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남편을 만난 이유도 ‘아이’를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막상 아이를 가져 보니 다른 꿈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남편과 나는 집을 ‘거주의 공간’으로 인지했었는데 이제는 ‘보유’에 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살다보니, 게다가 아이까지 생기고 보니 ‘내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새삼 어떤 지를 실감하게 된다.

하필 새로운 꿈을 꾸는 시기에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최고의 절정기를 달리고 있다. 주변 지인은 “단지 집을 사지 않았을 뿐인데 벼락거지가 됐다”며 분개했다. 나 역시 그 기분에 십분 공감한다. 결혼 전 신혼집 주변의 아파트를 소개하며 “대출을 조금 받아서 집을 사라”고 조언했던 부동산 어르신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부담을 지고 집을 마련할 것인가”를 한동안 고민했다. 결국 남편과 내가 내린 결론은 “기다려 보자”는 것. 10년 안에 등락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 사이 우리는 재무설계를 더 견고히 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과 직장 거리를 참고한 지역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도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복권을 사는 날에는 남편이 꼭 한마디를 더한다.

“자기는 나랑 딸내미 얻은 걸로 운 다 써서 안 돼.”

소소한 기대가 주는 기쁨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누리는 꿈에 대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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